오일장 소묘(素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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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수필가

오일장은 장이 서는 날만 붐빈다. 장이 파한 장터는 냉기가 흐르고 스산한 바람마저 불어 썰렁하다. 이것이 오일장의 속성이다. 요즘은 민속(民俗)과 시(市)자가 끼어 어감이 길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찾아든다. 그저 오일장으로만 불려도 좋았을 터인데…. 닷새에 한 번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일장은 막이 오른다. 사람들은 오일장에만 가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말을 수굿하게 믿는다.

한참 세월이 지난 이야기지만 예전의 오일장은 다양성을 내포했다. 시장기능은 물론이거니와 만남의 장소로도 한몫을 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한동안 적조하게 지내던 사돈과도 만나 회포를 풀었고 달포 쯤 소원했던 시누이와 올케도 서슴없이 소회를 주고받았다.

그 시절 오일장터에는 서민들의 삶이 오롯이 서려있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에 오일장엘 가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더라는 말을 자주했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새로운 정보가 장바닥에 널려있었다는 얘기다.

제주 4·3사건이 발발하고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져 집을 불태운다는 소식도, 어머님은 오일장에서 들었노라 하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어머님 가슴이 오죽했으랴.

그 황당하고 암울한 소식을 들은 어머님이 혼자 울었던 세월을 누가 헤아려주기나 했을까. 이제 어머님도 가셨고 오일장도 변했다. 그 시절 오일장은 백성들의 비애를 에두르는 질곡의 현장이었다.

예전의 오일장은 흥정으로만 값을 정했다. 공급과 수요를 얼개로 주객이 가격 결정의 헤게모니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유통구조의 평범한 시장원리다. 오일장에는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처럼 가격표나 바코드가 없다. 그래서 오일장에서는 흥정하는 맛을 만끽한다. 사람들은 그 맛에 매료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파안대소하는 여유를 마다하지 않는다.

흥정을 할 때는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기도 하지만 흥정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주객이 동시에 홍소를 터뜨린다. 오일장에는 가격파괴가 있고 덤이 상존한다. 그래서 오일장엔 늘 사람 사는 정취가 흐른다.

낮술을 마시고 목소릴 조금 높여도 크게 탓하지 않는 게 오일장터에서만 통하는 암묵적인 정서다. 속절없이 목소리에 힘을 싣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물에 잦아들게 마련이다. 오일장을 서민들의 삶과 비유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옛날의 오일장터는 역사의 현장으로도 한몫을 했다.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아우네 장터, 섬진강 물길 따라 경상도와 전라도가 어우러지는 화개장터는 구수한 노랫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장은 장돌뱅이 허 생원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오일장을 화두로 전개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벌교장터는 치열했던 현대사의 이념과 갈등을 예리하게 묘사한다.

이러나저러나 오일장의 백미는 파장을 앞둘 즈음이다. 이때쯤이면 다양한 삶의 소리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능청스럽게 막바지 흥정에 열을 올리는 소리, 시끌벅적한 웃음소리, 그중에 빠트릴 수 없는 게 장터의 싸움 소리다.

“이 봐! 사람 낳고 돈 났지, 돈 낳고 사람 났어!” “당신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여!” 어느 인권 운동가의 열변 같기도 하고…. 거친 목소리가 진한 여운을 남기며 시나브로 오일장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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