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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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자/수필가

아내가 재잘거릴 때 그녀가 당신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신호임을 감지한다면  당신은 백점짜리 남편이다. 설사 불평이나 원망일지라도  ‘그런가?’ 하며 들어 줄 수 있다면 이백점이다. 아내는 당신이 문제를 만들었다거나 해결해 달라고 종알거릴 적에도 사실은 그 것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를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오, 그랬어?’하는 추임새를 넣으면  삼백점이다. 나는 긴 세월 그 말을 듣지 못해 아직도 한이 서렸다.


아내가 당신을 미워하거나 실망하고 있을 때는 입을 다문다. 누구도 싫은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지 않는다. 여자는 친밀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건네는 경우가 많다. 해서 여자에게 말은 내용이이라기보다 소리다.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새소리라 하듯 그 소리다. 남자에게 여자의 말은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 매사에 짜증이 나기 쉽다. 하지만 아내가 뭔가 당신을 향해 소리를 내고 있는 동안은 그녀의 애정 전선에 이상이 없다는 표시인 걸알까, 그 소리가 귀찮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아내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서로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몰락이다. 사랑의 상승이 그러하듯 몰락도 빠르게 온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남편이 자기 말을 듣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당신은 아내의 귀빈이다. 귀빈이 되는 순간에 애정은 다시 양분을 듬뿍 받은 화초처럼 싱싱해온다.


남자인 당신도 누가 당신의 말을 묵살하거나 응답이 없을 때 결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재잘거림을 그치게 하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이다. 아내의 가슴에 앙금을 남기면 그곳에서 반란의 싹은 튼다.


말을 들어주는 직업인 남자 정신과 의사가 여자의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유혹을 받는 다고 고백한 글을 읽었다. 자상하게 말을 들어주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아내도 한때 꿈 많던 소녀였고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그 소녀가 살고 있다,  무심한 당신에게 지쳐 있을 때, 누군가 관심을 보이며 접근해 오면 반란의 싹은 고속 성장을 한다. 철이 덜든 아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남자가 노년에 이르면 다섯 명의 여자가 필요하다는 유머를 들었다.


집시람, 마누라, 애 엄마, 아내, 처, 그 다섯 명의 이름은 한 남자를 위한 여인의 지칭이다.


펄펄 날며 살던 청춘 슬며시 떠나고, 낙엽 다 떨구어 나목으로 서야하는 생의 겨울에 서면 인간관계나 가사에서나 서툴기 마련인 남자에게 아내는 필수 불가결의 존재다. 아무 여자나 가 아니라, 다섯 가지 호칭으로 불러도 되는 그런 여자.


집사람이나 마누라라는 명칭은 남자에게 늘 편하게 앉아도 되는 전용 소파와도 같은 이름이다. 가곡 향수에서처럼 사철 발 벗은 예쁠 것 없는 모습으로….


결혼 하자마자 구정물에 손 담구는 가정사에 묻히면, 아내는 이미 연인일 수가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역부족이다. 아이 낳아 기르며 양육의 무거움에 함몰되어, 아내는 점차 집사람이 된다. 나이 들어 틀이 잡히고 이런 저런 관리 능력으로 무장을 하고 나면,  여인은 이미 마누라다.


아내가 그런 변화를 겪는 동안 남자는 고개 돌리고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을 오로지 바라본다. 그녀들의  진정성이 아니라 살랑거리는 바람이 필요해서다.


그러다, 어느 사이 세월이 가고 남는 건 바람이 아니라 늙은 아내 뿐, 그제 서야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한 여자의 소중함을 깨우친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다. 칠십대의 마누라는 국보라는데, 나는 지금 주름이 잔뜩 잡힌 채로  보석이란다. 너무 늦게 보석으로 승진한 나는 생각한다.  ‘혹시 아직도 그에게 살랑거리는 바람이 있다면 기쁘게 보내줄 텐데….


젊은 날엔 왜 그토록 속이, 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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