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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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 초빙교수/논설위원

10년 전으로 기억한다. 탐라대학교가 지역개발연구소를 통해 서귀포 시민들에게 물었다. 서귀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첫 번째는 섶섬·문섬·범섬이 있는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 두 번째는 인정이 넘치는 서귀포 사람들, 세 번째는 서귀포에서 바라다 보이는 한라산 풍경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관광객들도 유사한 의견을 나타냈다.

제주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천지연과 교과서에 이르기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정방폭포’가 서귀포에 있는 것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문결과다. 집을 나서면 어디나 관광지인 서귀포가, 사실은 제주를 보물섬이게 한 보석이 아닌가?

1860년,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리기 위해 제주도에 직접 찾아왔다. 그는 서귀포에 도착해서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섶섬·문섬·범섬을 보고, 그대로를 지도에 새겨 넣었다. 대동여지도는 서귀포가 제주시와 전혀 다른 풍광임을 한 눈에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제주의 섬들은 거의 모두가 서귀포 바다 위에 떠 있다. 이 다정스런 섬들이 자아내는 어울림과 자연미야 말로 서귀포의 매력임을 말해준다. 하기야 이중섭화백이 서귀포에 머물 적에도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그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최근 들어 서귀포 시내에 고도 40m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바다를 조망하기도, 한라산을 바라보기도 어렵게 되었다. 소위 지역주민들의 공공조망권이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된 것이다. 서귀포 거리 어디에서나 한라산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어서 평생을 살아온 주민들에겐 실로 충격이지 않을 수 없다. 명산이 저기 있으니 내 무엇을 더 바라랴, 돈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한라산만 쳐다보면 행복했는데 말이다. ‘터억’ 하니 시야를 가리고서 팔짱 끼듯 노려보는 고층빌딩의 위세는 외지에서 들어온 깡패처럼 오만하고 방자하다. 이들의 건축허가를 서귀포에 와보지도 않고 산 너머에서 결정했다니, 이 탁상행정을 고산자께서 보시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상황이 이런데도 제주도는 서귀포시 상업지구의 고도를 45m까지 허용하는 도시계획안을 도의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도의회가 의결하기만 하면 매일올레시장과 이중섭거리 초입에 13층 높이의 대형건물이 들어설 태세다. 재래상권의 위축과 인근지역의 교통 혼잡, 소음, 공해, 쓰레기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게 자명하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의 조짐이 불안스레 서귀포를 맴돈다. 지역 주민들의 불편은 물론이고, 관광객의 감소가 예상된다. 누구를 위한 건물이며 무엇을 위한 건설인지 의심스럽다.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단상은 초저녁에 일찌감치 불이 꺼진 올레시장, 상권이 죽었다고 조기를 달아 건 상점들의 침묵이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어둠 속에서 한숨짓던 이 거리를 누가 되살려 놓았는가? 행정의 개발정책인가? 고층빌딩의 호객전술인가? 원도심의 난개발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임을 깨달은 제주시가 ‘옛 모습 되살리기’에 나선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서귀포는 낙후된 지역이 아니라 서귀포다움의 전통과 자연이 남아 있는 제주도의 오래된 미래임에랴.

‘오래된 미래’는 스웨덴의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인도의 고원지대에 사는 라다크족에게 불어 닥친 관광개발의 열풍이 어떻게 전통적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하며, 주민생활을 황폐화시켰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라다크 프로젝트를 통해 어떻게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생활양식과 자연생태를 회복하고 오래토록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이 라다크의 교훈을 환기하면서 서귀포의 미래를 제주시와 색다르게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서귀포의 오래된 미래’, 바로 고산자 김정호가 그려놓은 ‘서귀포다운 풍광’을 이제는 우리가 지켜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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