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역사 현장의 기록자에서 창의 인재의 길잡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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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前 한국일보 주필-1992년 리우회의 등 환경문제 이슈화…'휴먼르네상스' 인간 정체성 찾기 노력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69)은 미국에서 8년간 특파원 생활을 했다. 당시 한·미 및 남·북 관계를 뛰어 넘어 세계화의 흐름을 꿰뚫는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정치·안보·경제·환경 등 다방면에서 발품을 팔며 기사를 썼다.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충실하며 미래를 내다봤다.

그의 기사는 적중했다. 20세기 후반 인류는 미·소 냉전으로 핵겨울(nuclear winter)을 걱정했다. 지금은 급변하는 기후변화로 탄소여름(carbon summer)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저서 ‘0.6도’는 지난 100년간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0.6도에 오른 이면의 문제를 발품을 팔며 현장감 있게 다루면서 호평을 받았다.

▲어린시절=그는 1947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집은 안덕계곡 근처에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왕복 4㎞의 안덕초·중학교를 9년 동안 걸어서 다녔다. 제주시에 사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오현고에 입학했다. 내성적인 시골출신 학생이었지만 운 좋게 클럽(모임)에 끼면서 친구들이 생겼다.

1968년 서울대 문리과에 입학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목적으로 추진한 ‘3선 개헌’으로 대학가는 술렁거렸다. 동맹 휴학과 학내 사태로 어수선할 때였다.

대학 졸업 후 고향 감산리로 내려와 1년간 어머니와 농사를 지었다. 감귤 묘목은 친척이 제공해 줬다. 추위가 몰아쳤던 3월에 밤낮으로 구덩이 400개를 팠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 어머니는 물허벅으로 물을 길러왔다.

“400그루의 감귤 묘목을 심었는데 200그루만 싹이 났죠. 엄청 추웠다는 기억뿐이었죠. 2년 후 서울에 올라와 신문사에 입사하자 농사일은 마음에서 지워버렸죠. 지금 매달려 있는 감귤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것이죠.”

지난해 그는 ‘자유칼럼그룹’ 필진 15명,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과 함께 사과로 유명한 경북 영주로 여행을 갔다. 그가 전정가위로 사과를 익숙하게 따자 서울에서 온 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평생 펜대만 굴렸던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농부의 자식으로서 핏줄은 속일 수 없었다.

▲한국일보 입사=그는 1974년 1월 4일 한국일보 29기로 입사했다. 2000여 명이 응시를 했다. ‘바늘구멍’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입사 나흘 뒤 긴급조치 1호가 발령됐죠. 유신체제가 본격화됐죠. 언론 통제가 가장 심할 때 신문사에 들어갔죠.”

한국일보 29기로 29명이 입사했다. 그를 포함해 8명만 본사에 발령났다. 나머지 21명은 지방과 자매지였던 서울경제신문·코리아타임스·일간스포츠·주간한국 등에 배치됐다.

29기는 쟁쟁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기수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소설가를 비롯해 박무 머니투데이 창업자, 박무종 코리아타임스 사장, 임종건 서울경제 사장, 박경은 중소기업신문 대표, 박흥진 재미 영화평론가 등이 그의 동기다.

그는 편집부 기자, 사회부 기자, LA특파원, 정치부 기자, 정치부 차장, 국제부 차장, 뉴욕 특파원, 국제부장, 주간한국부장, 논설위원, 수석논설위원, 주필 등 한국일보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1983년부터 4년간 LA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칼(KAL)기 폭파 사건, 아웅산 테러 등 정국이 뒤숭숭해지면서 미국 이민 붐이 일 때였다. LA에는 우리 교포가 가장 많이 살았다.

“1986년 현대 포니엑셀이 미국에 처음 수출됐죠. 그 본거지가 LA입니다. 현지법인인 현대모터아메리카와 교섭해 ‘현대 엑셀을 타고 미국 50개 주를 가다’라는 기획취재를 했죠”

그는 기획취재에 보람을 느꼈다. 50개주는 모두 못 갔지만 미국 서부 전역은 엑셀을 타고 취재했다.

“30년 전 미국인들은 현대차(엑셀)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봤죠. 지금은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가 됐죠.”
▲뉴욕특파원=그는 1983년 LA특파원에 이어 1991년에는 뉴욕특파원으로 발령났다. 4년간의 뉴욕 생활은 기자 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1991년 9월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국제사회가 한반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한 셈이다. 유엔 가입 관례에 따라 양국 정상이 기조연설을 했다. 북에서 온 연형묵 총리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남북 화해 무드가 형성되면서 특파원 생활은 바빠졌다.

“국제연합본부 로비에서 북한 외교관들을 만나는 게 하루 일과였죠. 우스개 얘기를 꺼낼 정도로 사이가 발전했죠. 귀국하는 외교관들은 ‘북조선에 오면 맛있는 것을 대접하겠다’며 석별의 인사를 나눴죠.”

화해 무드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1993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핵시설도려내기 폭격(surgical strike) 승인 일보 전에 노련한 김일성이 폭격위험을 알고, 급히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했고 역할을 찾던 카터는 CNN취재팀을 데리고 덥석 가서 김일성과 회담하고 그냥 전쟁은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전쟁위기는 끝났습니다. ”

1994년에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그해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어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 승계가 초미의 관심이 됐다.

“북한에서 거물급 인사가 온다는 연락을 받았죠. 김영남 외교부장이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죠. 당시 회견에서 김정일이 정권을 이어받은 것을 외부 세계에 공표했죠.”

그는 뉴욕특파원 막바지인 1994년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취재를 했다. 정보통신(IT) 기술이 등장해 창업 붐이 일었다.

“이종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교민사회에선 맥도날드나 가는 ‘거지 할아버지’라고 불렸죠. 그가 55세에 실리콘밸리에서 IT회사를 창업했는데 대박이 났죠. 69세에 말이죠. 매출이 2억 달러를 넘으면서 성공 신화를 썼죠. 정말 대단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형은 이종근 종근당제약 창업주였죠.”

그는 특파원 시절 맨해튼 뉴저지에 살았다. 외교부의 정래권 과장이 점심을 사겠다며 집에 찾아왔다. 1992년 리우지구정상회의가 열리는 데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우리나라에서 정상급 인사가 가지 않으면 국제적 망신을 사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는 기후변화와 온난화 대신 석유 사용에 따른 탄소세 부과를 중심으로 1면에 기사를 썼다. 리우회의가 이슈화되면서 총리가 참석했다.

그는 옆집에 살던 박준영 중앙일보 특파원(전남지사 역임·현 국회의원)과 함께 브라질에서 리우회의를 취재했다. 취재를 마친 이들은 아마존 밀림을 4일간 탐험하며 원시의 세계에 대해 기사를 썼다.
▲대학생=요즘 그의 최대 관심사는 제주대학교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HRA)다. 2007년 시작해 햇수로 10년을 맞이했다. 1년 코스로 40주 동안 320시간의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들은 학생들의 진로와 함께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매월 6월에 대학생을 선발해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기업회계를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한다. 이어 전직 아나운서를 초청해 말하기 훈련에 돌입한다. 1년간의 과정에선 고전 읽기 및 토론하기, 비즈니스 실무 테스트, MBA과정을 도입한 경영학 수업이 이뤄진다. 겨울에는 기업 임원 등을 초청해 7박 8일간 합숙을 하며 조별 토론을 실시한다. 이어 인턴으로 직장 생활을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HRA는 이유근 한마음병원 원장이 산파 역할을 했죠. 교실이 없을 때 병원 꼭대기층 회의실을 내주면서 수업을 했죠. 이 원장은 후원도 많이 해줬고, 강좌가 원활히 될 수 있도록 사단법인 ‘위즈덤시티’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줬죠.”

현재 HRA후원회장은 김대환 전기차엑스포조직위원장이 맡고 있다. 초창기 예산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강기춘 제주발전연구원장과 이선주 제주대 화학과 교수가 정부 예산을 받도록 학교 프로그램과 연결시켜 도움을 줬다.

2010년 허향진 제주대 총장은 수업 참관 후 대학 취업전략본부와 연결시켜 강의실을 제공하고 일부 재정지원도 해줬다.

“저는 좋은 프로그램이 되도록 강사진과 후원자를 학생에게 연결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죠. 10년간 HRA강좌를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실패한 프로그램이라고 깨닫게 됐죠. 개개인의 두뇌와 마음속에 감춰진 자질과 능력을 스스로 발현하는 게 HRA강좌의 목적입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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