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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한곳에 뿌리 내렸으되 투덜대지 않는 심성에 끌린다.

한때 분재에 쏠리다 그만 뒀다. 생명을 도 넘게 속박한다는 죄책감에 더 염이 나지 않았다.

정리하다 서넛을 남겼는데 느릅나무가 잘못돼 버렸다.

스무 해 넘도록 분갈이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온전할 리가.

병충에까지 시달렸다. 갉아먹던 벌레가 날아간 뒤 새 잎 나기 두서너 해. 지난해 도장지에 내린 사색(死色)에 놀라 움찔했는데 때를 놓쳤다.

흙을 갈아야 하는데, 기본을 저버린 결과는 죽음이었다. 어쩌겠는가. 연(緣)이 다한 걸, 버리는 수밖에.

실(失)에서 터득한 잇속은 득(得)이었다.

소나무 분재가 수상쩍어 분을 해체했더니, 이럴 수가. 뿌리에 곰이 슬어 허옇지 않은가. 때를 놓칠라 잽싸게 내다 심었다.

동백 등걸이 고사할 낌새라 녀석도 곧바로 옮겼다. 둘 다 새 잎이 돋아나 청청하다. 아슬아슬하게 기사회생한 것이다.

십여 년이 더 된 일. 길사(吉事)에 받은 난분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조그만 난실을 한란에 내주고 보세란이며 양란, 본디 잎과 꽃이 연약한 교잡종들을 모두 마당 둘레로 내쳤다.

무턱대고 한 일이 아니다. “난도 절제할 줄 압니다. 생각해 봐요. 군락지도 자연 아닌가요. 들판에서 비와 서리와 눈을 맞으며 자랍니다. 환경에 적응하게 돼 있어요.” 난을 아는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에 신뢰가 갔다.

서너 해 동안 낯선 환경에서 비실거렸다.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고 조바심 나 종종댔지만 기우였다.

몇 년이 지나자 새잎을 내며 싱그럽게 자라 충천하더니 개화로 이어져 환호했다.

한 발 앞서 마당 외진 데 심었던 한 녀석을 테라스 앞으로 옮겼다.

눈에 잘 띄는 자리이니 한껏 맵시를 뽐내라 한 것인데, 아뿔싸 일 날 뻔했다.

지난여름 폭염으로 잎에 노르무레한 기운이 감도는 게 아닌가. 녀석, 영락없이 숨을 놓는가 보다 했다.

한데 소슬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슬그머니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어간, 새로운 터전에 뿌리박아 기사회생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서 명을 놓아 버린 느릅나무 분재와 되살아난 소나무, 동백나무 분재를 떠올린다.

생을 다한 나무는 옮겨 심을 수조차 없다. 수(壽)를 다했기 때문이다.

안에 들였던 난들을 마당에다 심어 놓은 것은 나름 과감한 시도였다.

전후를 살피다 실기(失機)할 것을 염려해 서둘러 한 실행은 잘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밖에 내다심은 것들이 우쭉우쭉 자라고 있으니 무릎을 칠 일 아닌가.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목전에 두고 있다.

사태 해결을 임계점까지 끌어올린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타오르는 230만 촛불의 힘이었다.

앞을 내다보며 합리적으로 제도적 근간을 바꿀 일이다. 시행착오로 만날 전철을 밟았으니 쳇바퀴는 그만 돌려야지, 어둔 과거 속에 오늘을 비춰볼 거울이 있다. 그게 답이다.

나라가 나아갈 바를 종잡지 못하고 떠 내린다.

우리는 앞을 휘황히 밝힐 올찬 인물을 갈망한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대화와 합의다. 그것의 선택과 절차와 결정은 대의명분을 따를 일이다.

이 나라의 기사회생, 촛불의 뜻을 받드는 일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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