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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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수필가

11월이 저문다. 마당가의 감나무도 제삿날을 기억하는 할머니처럼 계절을 잊지 않고 단풍이 들었다. 아이 손바닥만한 이파리들이 지난 태풍 때도 잘 견디었는데 이제 귀천할 때를 알았는지 바람 타고 우수수 내려앉는다. 해거리로 올해는 감이 별로지만 까치밥을 듬성듬성 챙긴 걸 보면 인정도 깊어라.


이파리가 떨어져 성긴 가지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듬지에는 작은 새둥지가 하늘 향해 다소곳이 앉아 있는가 하면, 옆 가지의 둥치에는 벌집이 터를 잡고 있었다. 새둥지는 아무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떠난 빈 둥지 같았다. 겨울나기를 잘해서 내년에 다시 새 생명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벌집은 꿀 잔치를 벌이는지 윙윙거리며 분주하다. 벌의 모양새로 보아 말벌인 것 같았다. 흠칫했다. 아내는 119에 도움을 요청하라며 나의 접근을 말렸다. 말벌에 쏘여 생명을 앗아갔다는 뉴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 난감했다. 그것들도 살아갈 방도로 이곳에 입지를 정했을 터인데, 어찌할까.


아내의 재촉에 119에 신고하려다가 가장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작전권을 내가 행사하기로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우선 방충모자가 필수였다. 양봉모자를 떠올리며 부산을 떠는데 아내가 양파망사리를 권했다. 옳거니, 망사리 두 개를 이중으로 얼굴과 목을 가리고 장갑과 작업복으로 중무장, 로버트 태권브이로 변신했다.


선제공격용 모기약과 벌집을 제거할 낫을 양팔 무기로 삼고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했다. 말벌들의 위세가 너무 당당해서 모기약으로 잘못 건드렸다가 성난 말벌들이 마당 주위를 전장으로 확산시킨다면 그 또한 낭패다. 모기약보다 더 강력한 선제무기, 궁리 끝에 군대의 화염방사기 위력을 떠올렸다. 바로 그거, 횃불이다. 


준비를 끝내고 불을 붙여 작전 개시, 기습작전을 펼쳤다. 태평스럽던 말벌들은 별안간 당하는 불벼락에 혼비백산,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리 용맹한 말벌군대라 하지만 활활 타는 화염에 화상을 입고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횃불작전은 말벌들의 항전을 무력화시키고 일거에 일망타진, 대첩을 거두었다. 119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혼자 말벌의 진지를 함락시킨 쾌거에 어깨가 으쓱했다. 개선장군인양 우쭐대는 나에게 아내도 뜻밖이라는 듯이 놀라는 표정이다. 그 분위기를 타고 허세가 절로 나왔다.


“말벌에게 겁날 내가 아니지. 내 손에 들면 어림없지. 까짓것….”


냉수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니 가슴이 시원했다. 뒷정리를 위해 다시 살펴보니 윙윙거리던 말벌들은 온데간데없고, 불에 타서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말벌들의 아우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순간 화끈거렸다. 4·3사건 때 다랑쉬굴에 불을 지른 토벌대가 연상되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것들의 생명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인지, 나에게 그런 권한을 누구로부터 위임 받은 것도 아닌데….


불현듯 혜국스님이 설한 신심명信心銘에서 ‘망견妄見’이란 법어가 죽비가 되어 어깨를 친다. 망견이란 망령되게 본다는 말로 잘못 본다는 의미다. 코끼리와 강아지의 생명의 무게를 생각할 때, 코끼리의 생명이 무겁다고 보는 마음이 망견이라 했다. 생명을 담은 그릇만 보기 때문이리라. 그릇 안에 담긴 본질, 그 생명의 무게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다. 부처의 전생담인 본생경本生經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도 비둘기의 목숨이나 사람의 목숨이나 코끼리의 목숨이나 그 목숨의 무게는 똑같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생명의 평등사상이다.


생명의 무게를 평등하게 보았더라면, 말벌들을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킬 생각을 왜 못했을까. 사람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아무 고민 없이 그것들을 살생시키고 터전을 빼앗았으니, 제노사이드의 범죄와 다름없지 싶다.


낙엽 한 잎 발아래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생명의 숭고한 자연회귀다.


콧잔등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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