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借景),자연을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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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진/제주학생문화원장, 동화작가

기온이 시나브로 내려가는 이맘때쯤이면 난 햇볕 고운 날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창호지문을 바르던 기억이 새롭다. 대설을 앞둔 이맘때쯤이었을까? 잠시 바쁜 일손을 내려놓고 곧 불어올 찬바람을 막을 준비를 했었다. 창틀을 깨끗이 닦아내고 창호지를 바른 창문은 겨울밤 어둠을 씻어내는 하얀 빛이었다.


흰 눈이 새로 바른 창문까지 쌓이던 날 눈을 치우며 내다보던 문밖의 하얀 세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기억 속에 먼 추억들을 하나씩 되살려 보려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모습에 전율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우리 조상들은 한지를 바른 창문으로 안과 밖을 소통했었다.


사람과 밥상은 물론 목소리와 부드러운 바람까지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 바람이 드나들땐 햇빛도 노랗게 물들었었다. 창문은 닫힌 듯 열린 공간이며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는 공간 그 이상의 신비로움이었다.


그렇다.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자연을 받아들이며 집을 짓고 창문을 여닫을 때마다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 낼 뿐 훼손도 소유도 하지 않은 채 자연을 빌어썼다.


말 그대로 차경(借景)이었다. 가지려 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쓰는 우리 조상들의 겸허함. 소유욕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에서 자연을 그 자체로 존재케 하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인가?


창덕궁 후원에 가보라. 그 곳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뜰의 극치를 보여준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밤에는 별들이 내려오고 산새들, 들짐승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어진 궁궐 곳곳은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은행잎과 단풍이 꽃바람으로 흩날린다.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 훼손하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니 자연과 사람의 공존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늦가을 제주 사회는 오라 관광단지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거세다.


조속한 사업추진을 요구하는 지역주민들 기자회견에 이어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혹 제기로 오라 관광단지 개발사업이 지역 최대 이슈로 부각됐다.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부동산 소유열풍과 대자본에 의한 토지잠식은 이제 오라 관광단지 개발사업으로 그 정점을 찍는 모양새이다.


청정자연과 원주민들의 미래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보장해주는 개발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어려움이 많겠지만 이 땅은 미래의 아이들로부터 빌린 것이라는 인디언 속담을 떠올리면서 사업추진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늦가을 저녁 바람이 차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집을 짓고 미래 아이들을 위해 오롯이 자연을 물려준 우리 조상들이 자랑스럽다. 바람 한 점 못 들어오는 단열재에 냉난방기까지 달고 살면서도 노란 햇살과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었던 그 하얀 창호지문이 생각나는 건 무슨 연유일까?


문풍지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할머니와 잠을 자던 그 긴 겨울밤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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