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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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수필가

삼경이 지났다.


난간에 내려서니 달빛이 청청하다. 샐그러진 열아흐레 달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다. 달빛을 등지고 서있는 소나무들, 가득 내린 마당, 달빛에 잠긴 산등성이. 태초의 천지간은 이랬을까. 어둠과 밝음으로만 가늠이 되어도 별천지 같다.


한차례 바람이 분다.


철야기도 중인 법당에서 절을 하면서 부르는 부처님 명호 소리가 노랫가락이 되어 하늘 밖까지 퍼지고 있다. 대지가 숨을 쉰다. 그 숨에 따라 나도 깊게 내쉬어 본다.
 


십여 년 전 늦가을. 해인사 백련암을 향해 가는 대구 공항은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춥고 음산했다. 처음 밟은 공항 주변의 도로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고, 길바닥을 가득 매운 검은 그 잎들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검불을 지고 있으면서도 장작을 지고 있는 듯 등에 진 짐이 무거웠던 것일까. 한 고비를 넘겨야 하는 사람만이 삼천 배에 이르는 절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그 고비를 넘으려고 산길을 올라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작했다. 내 짐이 무거운 만큼 발걸음도 무거웠다.


법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산 중이라 밤기운이 찬데도 반소매 옷을 입을 만큼 열기가 가득 했다. 법당 가운데는 주장자를 짚고 턱 앉아있는 성철스님의 좌상이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살아있는 듯해서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었다. 좌상 뒤편 벽에는 ‘그날의 화엄’이라는 스님의 다비식 광경을 그린 큰 그림이 세워져 있었고 상단에 길게 장식된 하얀 국화꽃 무더기 속엔 검은 색의 네 글자가 들어 있었다. ‘불기자심不欺自心.’ 흰 속에 검은 내 마음을 들킨 듯 화들짝 놀랐다.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니, 내 마음이 무언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볼 수가 없다.


절은 새벽녘에야 끝났다.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진이 다 빠졌다. 이미 내 몸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백배는 천 배 하는 만큼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했다. 온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했다. 처음 겪는 이러한 생소함들, 삼천 배 절을 하면서 신체적으로 느끼는 극한이라고 할 만큼의 통증, 천 근 만근인 다리를 일으켜 세워야 한 배가 채워지는 엄연함과 또 이를 견뎌야 하는 지루함, 그때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한 순간이었다. 어디서든 돌아오는 길은 늘 가벼운 법, 오를 때는 힘들었던 길이 걷지 못 할 만큼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내려가는 길은 신이 났다. 지극한 믿음이 아니어도 처음 마음 낸 길이었는데도 깊은 곳으로부터 벅찬 환희감이 막 솟아오르는 듯 했다. 내 영혼에 빛이 되었다.

 

세상은 그런 것 같다. 고통은 내 안에 흐르는 핏줄이다. 그 고통의 근원은 생로병사이며 일체 생명 있는 것들은 반드시 겪게 되는 엄연한 우주의 법칙이지 않은가. 힘들다고 벗어 던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 태어나면서, 나이 들면서, 병이 나고, 죽음에 이르면서 생겨나는 고통은 우리의 온 삶을 지배하며 슬프게 한다. 언제부턴가 나의 일상을 ‘~하겠습니다.’라는 의지가 담긴 화법으로 바꿔보았다. ‘해 보겠습니다’, ‘바로 보겠습니다’, ‘이해하겠습니다’,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행복 하겠습니다’ 등등으로. 무얼 갖다 붙여도 따뜻한 느낌이 난다. 모든 게 자연의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이며 그 작용으로 일어나는 본성적인 것들이기에 그 필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며 사는, 행복을 만드는 주제는 나의 몫이 아닐까.

 

떠ㅡ엉, 떠ㅡ엉.


새벽예불이 시작되려나 보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내가 만난 것들이 무엇인가. 어렵게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들은 또 무엇이었을까. 아마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귀한 인연은 세상이지 않을까.


하늘에 종소리가 퍼진다. 우주의 영혼을 깨우는 소리. 세상이 따뜻해진다.


온 세계가 화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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