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에 마로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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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영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관광영어학과/논설위원

문득 들리는 노래 한 소절에 가던 발길을 멈추고 상념에 젖을 때가 있다. 바람이 나뭇잎들을 건들거리게 하는 가을 아침, 하늘은 맑았다가 흐려지며 빛을 바꾸는데 바람에 실려 온 노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하고 시작되어 “아~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로 그 노래는 끝이 났다.

1971년에 발표된 노래로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애틋함을 주제로 다루면서, 눈물에 섞이는 봄비로 그리움을 표현하고,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바람에 불려간 낙엽에 비유한다. 나무에 새잎이 나고 꽃이 피었다가 지듯이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인간관계, 고갈되는 젊음을 애도하는 이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노래는 ‘1970년대의 통탄할 만한 우리나라 상황을 암시한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과 반대 시위, 휴교령과 대학 교정을 점거하던 탱크 등 청춘과 사랑을 다 마셔 버린 국가 폭력과 강요된 침묵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노랫말을 지은 이도 서울대 미학과 학사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로니에도 단순하게 불어 명칭으로 불리는 나무라고 넘어가기에는 역사가 많다. 마로니에의 우리나라 이름은 서양칠엽수이며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으로 흔한 가로수이다. 안네 프랑크가 일기에서 언급하여 유명했던 ‘안네 프랑크 나무’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마로니에였으며 2010년 폭풍에 쓰러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마로니에는 1912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황제 회갑에 선물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열강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시도했다가 강제 퇴위되어 덕수궁에 있었다. 나라 잃은 왕에게 네델란드가 마로니에 몇 그루를 기증한 것이다. 지금도 그 나무들 중 두 그루가 덕수궁에 살아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산 마로니에로 남아 있다.

이 보다 좀 더 젊은 칠엽수들은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데, 이들은 1929년 서울대의 전신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심어진 나무들로 일본이 원산지라고 한다. 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이었다가 공원이 되면서 지금 마로니에 공원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몰락한 왕이 받은 서양칠엽수와 제국주의 침략과정을 통해 들어온 일본산 칠엽수들을 우리나라에서는 둘 다 마로니에로 부른다. 아마도 이국적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막연한 동경과, 가혹한 현실을 잠시 가리면서 아련한 환상을 창조하게 하는 맛이 있어서 마로니에라는 이름이 애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봄부터 가을까지 문 닫힌 교정에 학생 대신 탱크가 있던 시절, 청춘도 사랑도 박탈당했다고 느끼던 젊은이들은 이제 단풍 들며 낙엽이 되고 있을 것이다. 그 시대와 사십년 이상 멀리 떨어진 지금, 달라진 것들은 많아도 여전히 나라의 근본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 사전에 아직도 남아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구석구석 도사린 부정부패가 우리를 강타한다. 어처구니없는 가운데 또 다른 유형의 암울함이 무겁게 사회를 덮는다.

그 결과 극심한 불평등이 이 나라의 청춘과 사랑을 쥐어짜서 마셔버리고 있다. 국가 또는 정부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어디를 향하여 우리의 삶을 향하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권력과 자본이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야욕과 기만은 앞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젊은이들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그 길에 마로니에는 피고 지면서 나이테를 더해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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