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문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박숙녀 수필가

온전히 머리를 비운 채 쉬고 싶다. 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후 어느 교우와 점심을 먹고 돌아온 이 시간, 엊그제 있었던 집안 행사로 아직 피로도 남아있는 터다. 이참에, 아니 그보다는 주일날은 쉬자는 생각을 앞세워 본다. 영화나 한편 볼까하며 TV를 켰다가 그것도 그만 두었다. 단순히 무념으로 있고 싶다.

 

얼마 전에 구입한 <기도와 명상을 위한 음악>CD를 오디오에 넣었다. 첼로와 바이올린, 피아노의 삼중주가 어우러지며 잔잔한 울림을 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을, 그것도 협주곡을 즐겨 들었는데 요즈음 들어 성가 쪽의 연주 음악을 더 찾게 된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느 노 화백의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화재가 나는 바람에 평생 그려놓은 작품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기자에게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아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면서 TV화면을 가득 채우던 모습이다.

 

얼마 전에 내 글이 성당주보에 실렸다.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이 주보 1면을 신자들의 글로 싣도록 하자 집필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되어 내 차례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늘, 나는 내 글이 나오면 어떤 반응이 있을까 하며 은근히 기다리곤 하였다. 다행히 읽은 지인으로부터 “잘 읽었다.”고 돌아오면 그리 고마울 데가 없다. 나로서는 어렵게 내놓은 글이라 누군가에게 읽히며 ‘살아있다.’고 화답하는 소리로 들린다. 일단 보내고 나면 미련을 버려야 하는데 얼른 떨치지 못한다.


오늘 밥을 같이 먹은 교우도 꽤 가까이 지내는 편이다. 한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실 나도 잊고 있었는데 막상 마주 앉게 되자 어떤 기대감이 마음 한 자리에 슬그머니 들어섰다. 언뜻 서운함이 고개를 들었지만 기다렸다. 하지만 식사하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마음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변방만 돌다 일어서게 되었다.


헤어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어차피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가늠하기 어려운 게 마음의 거리이지 않은가. 더구나 같은 주제로 공감대가 형성된 사이는 더욱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막 걸음을 떼던 교우가 돌아서더니 “참, 주보의 글 잘 읽었어요.”하고선 손을 흔들며 웃는다.


아차! 가슴이 철렁했다. 이 일을 어쩌랴. 들켜버린 속마음을 얼른 수습하며 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는데 소실되어 차라리 잘 되었다는 노 화백은 노자의 말씀대로 자연의 도(道)에 순응하는 상덕(上德)에 오른 선비였다.
 


자문해 본다. 나는 지인들과 얼마나 고운 말대접으로 통섭(通涉)하며 사는지를.


주보에 실린 글만 해도 그렇다. 신부님과 여러 교우 분들이 “잘 읽었다.”, “잘 썼다.”며 격려해 주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더 받으려는 욕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거다. 졸고를 내밀며 가당찮게 더 바라고 있었으니 이것 또한 스스로 공(功)을 자랑하는 꼴이 아닌가. 한낱 세상적인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진다.

 

하늘이 높다. 울타리 안으로 날아든 잠자리가 마당 안을 맴돈다. 고요하다. 첼로의 장중한 선율이 깊이 스며든다.


얼핏 가슴 속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 슬픔 같은데 슬픔이 아니다. 이건 감사함이다. 무한한 감사에서 오는 울컥함, 바로 그것이다. 고요한 가운데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는 감사, 그런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이런 고귀함이 또 있을까….

 

이제 곧 가을도 깊어지겠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