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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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수 수필가

아침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계절은 어느 새 가을의 한가운데서 멈칫거리고 있다. 한라산에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단다. 며칠 있으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다. 지난여름의 그 고약한 더위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무상한 세월의 변화에 경악할 따름이다.


길옆에서 하늘거리는 하얀 억새꽃들의 인사를 받으며 관음사 탐방로 주차장에 들어섰다. 경로우대 대상이니 무료로 주차를 하란다. 백발에다 벗겨진 이마가 신분증 역할을 한 모양이다. 벌써 수 십대의 차량이 들어와 있고 등산복 차림의 산객들이 입산하고 있다. 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서 평상에 앉았다. 평상 위에는 어젯밤에 떨어졌구나 싶은 낙엽이 수북하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도 어깨 위로 낙엽이 내려앉는다.


조릿대 우거진 등산로를 따라 걸으며 산 밑으로 내려오는 가을 정취를 만난다. 들꽃, 낙엽, 상큼한 공기 그리고 짙푸른 하늘. 추색이 짙어지고 있다. 졸참나무는 밑둥치부터 우듬지까지 빼곡한 이끼로 방한복 차림을 하고, 사람주나무의 넓은 잎은 분홍빛 웃음을 보내고 있다. 산위로 오를수록 붉은 빛이 더욱 진해지고 벌어진 가지 사이로 하늘이 높아 온다.


건조한 날씨 때문에 냇물이 바다로의 여행을 멈추었다. 깊은 웅덩이에 고인 물위에는 퇴색한 낙엽들이 미동도 없이 떠있다. 물이 철철 흘러야 바다 속 수초와 플랑크톤을 살찌울 텐데.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일행 삼아 걸을 요량이었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다.


쉼터의 긴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 밑에 깔린 낙엽은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산객들을 바라본다. 또다시 걷는다. 뒤질세라 헉헉거리지 않아도 좋다. 오늘은 홀로 유유자적하다가 적당한 시간에 되돌아가면 그만이니까.


탐라계곡 마른 냇바닥에 다리 펴고 앉았다. 가파른 오르막 길 위로는 울긋불긋한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희끗한 엷은 구름이 잠시 가렸다가는 다시 걷힌다. 깊어가는 가을을 만났으니 인제 더 올라가야할 이유가 없다.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며칠 전 태풍에 꺾인 듯 보이는 둥치에 가지를 매달고 서 있는 고목의 아픔을 본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저 나무들도 피해 갈 수는 없는가보다. 나무들의 수명이 수종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일반적으로 200∼300년가량이라고 한다. 살아있을 때도 생태계에 영향을 주지만 죽어서는 더 큰 보시를 한다. 수많은 곤충과 벌레들에게는 집이 되어주고, 버섯이나 이끼류에게는 양식이 되어 아낌없이 주는 것이 나무의 일생이다. 신록의 가지 위에 꽃을 피우며 벌 나비를 희롱하던 여름날을 추억이나 하고 있으려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들과 함께 산행 길에 나선 소녀들 여남은 명이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말투가 어눌하다. 제주시내의 어느 학교 특수반 학생들이란다. 위험한 돌 틈 길 위에서 손잡고 넘기는 선생님들의 손길이 단풍처럼 곱다.


‘굳이 이런 험한 코스를 택한 이유가 뭘까?’


도전정신을 키우고 성공감을 맛보게 하고 싶은 제자 사랑의 마음이겠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계곡 옆, 절벽 아래쪽으로 동굴이 보인다. ‘구린굴, 길이 442미터, 석빙고로 사용되었음, 숯가마 터와 주거 흔적이 주변에 있음.’ 이것은 안내판에 쓰인 문구의 주요 내용이다. 산짐승이나 다니고 약초를 구하는 이들이 조심스럽게 다니던 숲길이 지금은 자연 치유를 원하는 이들이 찾는 등산로가 되었다.


삼신산이니 한라영산이니 하며 산을 숭배하던 그 옛날의 정서는 많이 퇴색했다. 그러나 높고 큰 산은 아직도 산객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조심스레 올라가던 소녀들과 숯가마 일을 하는 일군들의 바쁜 걸음이 교차하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정오에 가까운 해가 숲 바닥에 둥근 반점을 찍어내고 나는 그 위를 밟으며 내려간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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