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정의를 통한 사회적 치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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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논설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는 6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수정주의적 시각을 드러낸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대작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지난 10월 21일 제6회 제주 4·3 평화포럼에서 ‘미국의 책임과 제주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을 했다.

여기서 그는 1949년 당시 제주도지사가 6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4만명이 일본으로 피난을 갔다는 내용을 미국 정보국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미국지도자들이 평화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세력을 강경 진압하라고 명령했고, 미군도 진압에 가담했다”며 “미국은 4·3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1998년 4·3사건 제50주년기념 일본 도쿄강연에서 같은 말을 했었다.

“4·3 사건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반란세력을 강경 진압할 것으로 명령했고, 마침내 진압된 것에 만족해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내용 중 주목할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시기였던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제주섬은 육지와 대조적으로 평화롭게 운영되었다. 그래서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은 1947년 10월, 미 의원들이 내한했을 당시 제주를 매우 평화로운 공간으로 소개했다. 즉 제주는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제주인민위원회가 평화롭게 통제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둘째 유해진 제2대 제주도지사는 육지 출신 극우파로서 우익 청년단체와 모종의 커넥션을 맺고, 반대정당을 무자비하고 독재적으로 다루고,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 자라면 당연히 좌파라고 낙인을 찍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몇 달 동안 그가 확실히 승인한 단체 이외에는 누구도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했다.

유 지사는 극우파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일했던 육지인들과 북한 서북지역 출신의 피난민들을 제주 경찰대로 조직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비인가된 곡물 수집량은 공식 수량보다 5배나 많았다. 그래서 원성이 높아지자 미군 조사단이 나서서 이런 점을 확인하여 유 지사 해임을 요청했지만 월리엄 F. 딘 미군정 사령관은 이를 묵살했다. 결국 미군은 4·3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비화되는 과정을 사실상 묵인, 방조하고 말았다.

셋째 문제가 일어난 원인은 ‘공권력의 무능(원택윤 서울 검찰관)’과 ‘전적으로 경찰의 탓(제9연대장 김익령 중령)’이라고 지적되었음에도 미국은 진압을 감독하고, 반란 진압군을 훈련시키고, 수감자를 심문하고, 게릴라 세력을 찾기 위해 미군 탄착 관측기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진압에 직접 가담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미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은 ‘게릴라 단체들로부터 해안마을을 보호하도록 무기 소지 폭도를 체포하고 그리고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살해와 위협을 근절한다는 확실한 임무를 경찰에 지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커밍스는 ‘평화로운 화해를 위해 4·3으로 대립되는 양 쪽의 노력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앞으로 남과 북의 평화로운 화해를 위해서도 4·3은 더 많은 진실이 필요하다. 피해자와 생존자가 밝히는 진실은 회복적 진실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번 4·3포럼은 미 정보조사국 전 동북아국장 존 메릴 박사가 참석함으로써 더욱 빛이 났다. 그는 4·3 비극의 책임에 주목하면서 한국사회에서 4·3학살에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할 이승만을 영웅화하는 짓은 잘못이라고 못박았다. 인권과 정의를 통한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이유이다.

섣부른 화해나 상생을 운위하기 전에 회복적 정의, 피해배상부터 실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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