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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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오성자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긴 모가지를 흔드는 꽃, 칸나가 다시 한 번 봉우리를 피운다.


얼마 전 휩쓸고 간 태풍으로 자태는 초췌해졌지만 의연하게 꽃을 피운 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 생의 의지는 어디까지인가. 부디 저 꽃만 같아라. 돌아올 봄이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을 피우니 너에게 이별은 휴식과 같구나.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는데 방황은 줄어들고 이별은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젊을 때 지병과 같았던 방황이 줄어들어 이제 좀 살만하니 잠복했던 적군처럼 가까운 이들의 병고와 이별이 공격을 개시해온다.


오래 앓았던 노모와의 이별은 준비가 되었다하더라도 형제와 친지들이 곳곳에서 병고를 겪고 있다. 하늘에는 별, 지상에는 꽃, 인간에겐 슬픔인가.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 일상을 배제하지 못하는데 있다. 왜 하필 가족의 병고로 충격을 받ㄴ은 나날 중에 원고를 써야하나. 오늘은 길가에 흔들리는 깃발을 봐도 바람보다 수심이 먼저 펄럭인다.


늘 자신의 심연을 파헤치며 글을 써야만 남는 장사가 되었다. 그런 글은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겉핥기로 들여다보면 무미건조한 글이 되었다.  그런 글들은 나름 치유하지 못했다. 치유는 오로지 자신과의 눈을 부릅뜬 한 판 승부에서 왔다.


고갯길 같은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더 이상 나를 훼손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것들과 작별을 했었다. 한 번 속사포처럼 외워도 시간이 걸리는 만트라를 태워버리고 법원으로 향했다. 불안에 시달리는 날에는 21번, 어떤 날은 일곱 번씩 읽으면서 너덜너덜해진 종잇장으로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그 끝에 불을 붙이자마자 공중으로 사라졌고 순식간에 오랜 틀에서 홀가분해졌다.


누구의 의지가 기나긴 방황을 멈추게 하였을까. 신변의 변화가 있자 삶의 에너지장에도 변화가 왔다. 아무리 좋은 기도와 몰입도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것은 위험한 매너리즘이었다. 육신의 일생처럼 내면의 영성도 숱한 기로에 선다. 육신에게 음식물이 그렇듯이 영적인 주력은 중요한 섭취이며 선택이다.


좀 더 성장해야하는데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오전에만 잠깐 학생의 정신이고 오후에는 스르르 몸이 풀려서 노인의 정신이 되고 만다. 정신이 맑을 때 영적인 섭취를 하고, 나른해지는 시간에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건강을 다진다.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곳곳에 잠복해 있는 슬픔들을 꽃과 별로 생각하자. 가슴에서 뜨겁게 회오리치던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가. 밤길을 걷다가 조그만 반딧불이 빛을 내는 것을 보며 울컥‘삶의 부채(負債)라는 것을 생각했었고, 힘들 때는 돌 구르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 신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온통 선물이다. 바다와 파란 하늘을 보면 커다란 선물보따리 안에 서있는 것 같다.


육신의 병은 눔에 보여서 더욱 가혹하다. 바다를 향하는 푸른 물줄기와 같았던 정맥은 멍이 들고 멀쩡하던 몸에 줄줄이 밧줄이 걸린다. 정신은 마구 쇠약해진다. 이럴 땨 더욱 영적인 엔진을 세차게 가동해야한다. 영과 육은 때론 공조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낸다. 전설의 바징가제트만이 합체와 분리를 하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병고를 겪는 이들이 힘든 터널을 지나 더욱 큰 사랑의 그릇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도한다. 모진 태풍 끝에서 벙긋 꽃을 피운 저 칸나는 자신의 재탄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정한 꽃에게 주어진 선물인가. 그렇가면 나도 당신도 순정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 가을의 길목에서 나는 꽃에게서 교훈을 얻는다. 칸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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