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속도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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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성. 재 뉴질랜드 언론인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는 100m를 10초가 채 안 되는 시간에 달려 지구촌의 우상이 됐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숨 한 번 쉬지 않고 달려 영웅의 자리에 올랐다. 100m 달리기는 얼마나 빠른지 겨루는 속도 경기다. 기록 단축을 위한 경쟁이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100m 달리기의 중요성은 일부 운동 경기를 제외하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9초와 10초가 가져오는 차이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없다. 속도가 아무리 중요해도 속도에만 집착하면 다른 데서 문제가 터지는 게 우리들의 삶이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속도를 상당히 중시한다.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선착순에 길들여진 군대문화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느린 건 게으른 것이라는 이상한 등식과 양적 성과주의가 한국인들의 뇌리에 너무 깊숙이 박혀버린 느낌이다. ‘시간은 금’이라는 속담을 단순히 속도개념으로 받아들인 탓도 있을 것이다. 느릿느릿 팔자걸음을 걷고 풍류를 알던 한국인들이 멋과 여유를 잃고 속도전에 빠진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식당에 가서 앉자마자 빨리빨리를 외치는 건 희극적이다.

최근 새로운 명품으로 세계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삼성전자 갤럭시노트7의 등장과 퇴장을 보면서 느낀 건 현란한 속도다. 경쟁 상품의 출시를 앞두고 먼저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잇따른 발화사고로 불명예 퇴장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두어 달 남짓이다. 제품을 리콜하고 새 제품을 만들고 교체하는 작업들도 그 사이에 숨 가쁘게 이루어졌다.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하드웨어와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명품이 불꽃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수백만 대가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이미지 실추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삼성은 물론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빨리 고치는 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값진 충고다. 갤럭시 사건이 속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뼈아픈 교훈이기도 하다.

뉴질랜드 얘기다. 오클랜드에 있는 한 공설 수영장은 고장 난 샤워장 수도꼭지 2개를 고치는 데 일주일 넘게 걸렸다. 수도꼭지 6개 중 2개가 고장 났기 때문에 이용객들은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런데도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걸 늑장부린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조그만 일에도 절차가 있다는 걸 알고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병원 대기시간이 길어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예약하고 온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항의하는 환자도 보지 못했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직원도 보지 못했다. 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산대 줄이 길어졌다고 계산을 서두르다가는 차례를 기다리던 손님들이 불안감을 준다고 불평하며 그냥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뉴질랜드인들은 비가 올 때 우산이 없어도 좀처럼 뛰지 않는다. 그냥 젖으며 걸어간다.

이런 문화와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속도는 절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트랙 위의 볼트에게는 박수를 보내도 삼성이 보여준 현란한 속도에는 탄성을 내지를 수가 없는 것이다. 빠른 서비스가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건 한국인들만의 착각인지 모른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문제가 생겼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고 확실하게 고칠테니 참고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용기와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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