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후 국문 지위 얻고 맞춤법 통일되며 뿌리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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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글의 정착-한글 창제 458년간 기록문자 인정 못 받아 '서러움'
주시경 선생, 국어문법 연구로 외래어 표기도 가능해져
▲ 세종대왕 상

▲한글의 부흥기는 고종31년(1894년)~한일합방(1910년)까지이다.


한글(훈민정음)이 창제 반포된 것이 조선 4대 세종28년이라면, 조선26대 고종31년(1894년)에 일어난 갑오경장(甲午更張)은 한글의 창제 반포된 지 꼭 458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한글이 창제되어서 458년 동안 한글은 한자에 밀려 국가의 공식문자인 나라의 문자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문서의 기록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서러움을 받아온 것이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고종31년(1894년) 미흡한 채로 갑오경장이 일어남으로 하여 동년 11월 21일에 고종의 칙령(勅令) 제1호로 ‘법률과 법령을 한글로 씀을 원칙으로 삼고, 한역문(漢譯文)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하라’는 결정이 내려져, 한글이 비로소 국가의 공식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국가문자로 인정을 받게 되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취지와 목적에 맞는 백성의 글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시기를 한글의 제2의 탄생 또는 새로운 부흥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글의 부흥기에는 갑오경장으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늦게나마 근대국가로서의 늦은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신식(근대)학교의 설립, 국문법 연구의 획기적 발전, 신문학 창작활동(신시, 신소설), 신시대의 연극 활동(구극, 신극, 창극, 판소리 등), 언론으로서의 근대적 신문 발행, 잡지의 등장, 성경의 번역 등으로 한글이 널리 보급 활용되면서 한글이 국문자로서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의 마음속으로 녹아들어가 국민과 한글이 일심동체가 되며, 언문일치가 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시기이다.


문장표현에 있어서도 운문체문장에서 산문체문장으로, 순수한문체문장에서 순수한글문장으로, 문어체문장에서 한글중심의 구어체문장으로, 일부분야 산문체문장에서 전분야 산문체문장으로,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한글이 외국서적을 번역하여 국민들과 만나게 되는 경탄할 일이 생기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주시경 선생(1876년~1914년)의 국어문법 연구 내용이다. 주시경 선생이 지은 ‘국어문법(1910년)’은 음운론으로서의 소리갈, 품사론의로서의 기난갈, 문장론으로서의 짬듬갈의 용어와 내용을 처음으로 연구하였으며, 또 다른 국어음운에 관한 저서 ‘국어문전음학(1908년)’에서는 국어음운을 닷소리, 홀소리로 분류하고, 이중모음이 받침하는 경우와 각자병서의 타당성과 실제 발음상의 여러 특징을 상세히 논하여 한국근대와 현대의 국문법연구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업적을 세웠다.


또 한 가지는 1907년 7월 8일에 학부 내에 개설한 국어, 국문연구기관으로 ‘국문연구소’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위원들을 임명하여 1907년~1909년까지 23차 회의를 열어서 국어, 국문에 관한 11개의 문제에 대하여 심의하여 내각에 제출하였으나 공포 전에 학부대신 이재곤이 사임함에 따라 신효성이 없었다.

 

▲다음은 한글의 정착기로서 1910년부터 1939년(일본이 조선 모든 학교의 국어과를 폐지하게 되는 연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조선어학회가 창립되어 한글 맞춤법이 통일되고, 조선어 표준말이 사정되어 발표되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을 표기하는데 끝나지 않고 외국의 외래어 표기마저 연구하여 그 규정까지 만들고, 한글사전까지 편찬할 생각을 하는 등 한글의 기초가 탄탄히 세워지는 이 시기를 저자는 한글의 뿌리를 내리는 정착기라 하였다. 1908년 8월 31일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주시경 선생의 주도에 의한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어 그 창립위원으로 장지영, 김윤경, 신명균, 임경재, 최두선, 이규방, 권덕규였으며, 창립목적은 국어의 정확한 법리 연구 및 국문의 정리와 통일이었고, 변화과정은 국어연구회로 발족하고 나서 배달말글몯음 및 한글모 거침,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개칭, 다음은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당시의 사업실적으로는 한글지 창간, 한글날 제정,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위촉,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발표(1933년 10월 29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표,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발표, 한글큰사전 편찬을 위한 각계인사 108명 위촉,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위원 위촉 등이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나오기 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제정한 언문철자법이 있었다. 1920년대에 와서는 새로운 신문이 발행되는데, 그 때 당시 중요한 신문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시대일보 등이 나와서 국한문 혼용의 독특한 신문체 문장이 등장했다. 또 새로운 잡지발행이 물결을 이루었는데, 창조, 폐어, 백조, 영대, 조선문단, 개벽, 시문학, 구인회, 문장, 인문평론, 시원 등이 발행되어 한글보급 발전과 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현대소설과 현대시의 창작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한글에 의한 표현의 자유와 한글의 진가를 찬란히 빛나게 하는 한글의 전성기라 아니할 수 없으며 한글이 화려한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의미 활용의 극치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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