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골 읍성 지키던 돌하르방 왜 무덤가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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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안덕면 송악산의 돌하르방

▲옹중석의 유래


원래 옹중석(翁仲石)은 중국의 수호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한국에서 옹종석은 무덤을 지키는 석상으로도, 길가(路邊)의 장승을 부르는 것에도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는 옹중석이 석상 일반을 불렀던 일반적인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돌하르방은 그 중심이 제주이지만 인접 문화권인 한반도 남부지역의 석장승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김몽규 목사가 제주사람이 아니라 발령받아 온 육지 관리라는 점에서, 김몽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제주의 석공에게 시켜 돌하르방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덤의 석상,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진 장승 문화와도 돌하르방이 교감한 동일문화권의 상호작용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소위 옹중의 유래는 옹중이라 불렀던 금인(金人)으로 진시황 때 쇠를 녹여 만든 동상이었고, 그 금인의 탄생은 진시황이 통일의 대업을 지키기 위해 민중의 반란이 두려운 나머지 무기를 회수하는 구실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옹중석이라는 말은 당나라 때 사람 사마정(司馬貞)의『사기색은(史記索隱)』에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 유학자들은 이 ‘사기색은(史記索隱)’을 인용하여 옹중석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그 후 한학자들은 줄곧 묘 앞에 세우는 석상마저 옹중석이라 불러왔으며, 이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옹중석을 무덤의 문·무인석, 미륵, 장승, 기자석 등에 까지 분별 없이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옹중석은 대개의 경우 무덤의 석상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을 다녀온 조선의 학자들의 문헌에 무덤의 석상으로 기록되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었다.


명나라 정등길(程登吉)이 찬(選)하고 청나라 추성맥(鄒聖脈)이 주(註)한 ‘유학경림(幼學瓊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묘 앞의 석상을 원래는 옹중(翁仲)이라 했으며(墓前石人 原名翁仲), 영구 앞에 나가는 깃발을 명정(銘旌)이라고 한다(柩前功布 今曰銘旌)’라고 하였고, 그 주석(註釋)에는‘“옹중(翁仲)은 동상(銅像)을 대신하는 말로서 진(秦)나라 때 완옹중(阮翁仲)이라는 자가 진시황의 명령으로 흉노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죽자 진시황이 그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咸陽宮) 사마문(司馬門) 앞에 세웠다’라는 것이다.


 

▲ 서귀포시 안덕면 무덤의 돌하르방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진섭세가(陳涉世家)’에는 ‘鑄以爲金人十二’라 하고,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 ‘各重千石 坐高二丈 號曰翁仲’ 이라 하였다. 즉 위 기록에 의하면, 옹중은 묘 앞의 석인이고, 그 유래가 진시황 때 죽은 완옹중을 쇠로 만들어(金人) 수호신으로 세운 것이 그 유래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 ‘진섭세가(陳涉世家)’를 보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곧, 선왕(先王)의 통치 방법을 폐기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불사르고 백성을 우롱하였고, 6국의 이름난 성곽(名城)의 방위공사를 파괴했으며, 제후국들(諸侯各國)의 영웅호걸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천하의 병기를 수집하여 함양(咸陽)에 집중시켰고, 칼, 창, 활, 화살 등을 녹여서 동상(銅像) 12개를 주조함으로써 천하 인민의 반항을 약화시켰다’고 한다. 사마천은 진시황이 통일대업을 완성하고, 민중들이 무기를 들고 반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12개의 동상을 주조하였다는 것이다. 


완옹중에 대한 이야기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에 의해서 알려졌다. ‘완옹중(阮翁仲)은 안남(安南·베트남) 사람인데, 키는 2장(丈) 3척(尺)이나 되고 기품은 단정하면서 씩씩하여 보통 사람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젊었을 때 고을 관리(縣吏)가 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병합시키고 옹중(翁仲)에게 병권을 맡겨 임조(臨?)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노(匈奴)에게 떨치자 진(秦)나라는 이를 영광으로 여겼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전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2년 을축(1865)의 기록에 완옹중에 대한 대화가 나온다.  상(고종·필자주)이 ‘쇠사람(金人)을 옹중(翁仲)이라고 부르는가?’ 하니, 김세균이 아뢰기를, ‘진시황 때 완옹중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키가 1장 3척이고 지혜와 용기가 탁월하여 명성이 흉노에까지 떨쳤습니다. 쇠사람을 옹중이라고 부르는 것은 흉노로 하여금 두렵게 하려는 것입니다’ 위의 이익의 글에 의하면, 완옹중에 대해서는 사서(史書), 즉 역사의 기록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로 미루어 옹중은 죽어서 수호신이 되었다. 그러나 완옹중에 대한 두 기록의 차이가 있다면, 키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익은 2장 3척이라 했고, 김세균은 1장 3척이라 하고 있는데, 이는 완옹중에 대한 정확한 사서의 기록이 없어 구전 설화로 전해진 까닭에 이런 후세의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 서귀포시 대정읍 무덤의 돌하르방

▲무덤의 석물과 장승도 옹중석


옹중석을 무덤의 석물, 즉 묘표나 석인상으로 부르고 있는 사례는 고려시대 문인인 이색(李穡·1328~1396)의 ‘길 가던 중에(途中)’에 라는 시에,  ‘무너져 가는 무덤의 옹중에 봄 볕이 저무네(廢丘翁仲春光老)’에서 보듯 조선시대는 대체로 옹중석을 무덤 앞의 석인상을 지칭하는 경우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주로 한학자들이 자신의 저서에 무덤의 석인상이나 장승, 미륵 등을 분별없이 옹중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수호신적인 의미가 있는 석상 일반을 옹중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의 유행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제주 무덤에 돌하르방을 세운 것의 의미를 고찰해 보면 조선시대 무덤의 석물을 옹중이라고 불렀던 유학자들의 전통이 전해진 것이고, 또 읍성을 지키는 돌하르방의 수호신적 기능이 있어 무인(武人)으로 인식된 점 때문이고, 그리고 옛 대정현 지역이 돌하르방 제작 전통이 남아있어 그것이 수호신의 모델이 돼, 무덤의 석상으로 차용된 점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돌하르방은 옹중석이 성문 앞에 세워져 읍성을 수호하고, 주술 신앙적인 기능을 갖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무덤의 수호신, 민간 신앙적인 미륵, 이정표나 마을 수호신과도 같은 장승의 표시 기능을 포괄하는 옹중석의 전통에서 새롭게 살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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