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
원초적 본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영자 수필가

창문을 열고 새벽을 바라봅니다.


오래전 남편이 다세대를 지을 때 심은 야자수가 수많은 태풍과 엄청난 폭설을 견디고 살아 있어 대견합니다. 남태평양의 카리브해변이 고향일 것 같은 야자수, 낯선 땅 제주에서 곁가지 하나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솟아오릅니다.


거실의 통유리와 침실의 네 쪽창 그리고 식탁의 창을 가득 채우며 미풍에도 춤을 춥니다. 긴 세월 창을 기웃거리며 타향살이하는 나를 말없이 사로잡았습니다.


광풍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갈기갈기 찢어진 잎으로 끝없이 기막히게 춤을 춥니다.


이 나이에도 우왕좌왕하는 나에게 하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움과 아쉬움, 욕망의 곁가지를 다 잘라 버리고 춤추며 살라합니다.


창조주의 대변자 같은 와싱톤 야자수가 언젠가 내 임종을 지킬 것 같습니다


요즘 남편과 함께 S대학에 다닙니다. 우리 교회에서 동네 어른들을 섬기는 모임입니다. 수요일 아침마다 한껏 멋을 낸 어른들이 마을 회관에 모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일흔 살부터…’교가를 부릅니다. 백이십 살까지 건강하게 살아보려고 스포츠 댄스를 합니다.


허리가 굽은 어르신도 등산하듯이 삼층 강당까지 오셔서 의자에 앉아 아기처럼 손춤을 춥니다. 춤추고 싶은 마음은 원초적 본능인가 싶습니다.


사십대 초 남편이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파리에서 물랭루즈쇼를 보았습니다. 부드러운 스테이크에 포도주와 샴페인을 마시며 보는 캉캉은 관능적이고 현란했습니다. 쇼가 끝나자 머리가 하얀 노부부가 제일 먼저 홀에 나왔습니다. 노부부의 왈츠는 긴 가을 詩를 읽는 것처럼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쇼가 끝나면 관객이 춤추며 즐긴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왈츠를 배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와인 한잔을 마신 후라 용기를 내 춤추고 싶다고 말했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팔십의 남편과 라틴 댄스 차 차 차를 춥니다. 아직도 낭만이 살아있나 봅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 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알파치노의 탱고 신을 생각하며 욕심을 냅니다. 남편이 돌려주면 멋지게 돌고 싶은데 마음뿐, 스텝 밟기에 쩔쩔맵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늘 듣는 가사가 춤을 출 때는 덜컥 덜컥 마음에 걸립니다. 언제 가도 괜찮은 나이, 헤어질 날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하면 이 순간이 참 소중해집니다. 하루를 천 년 같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든 사람이 다리 아픈 걸 잊을 만큼 춤에 빠져버렸습니다. 남편도 힘들다고 하면서 빠지지 않으려고 댄스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해녀들도 밀감 농장을 하는 분도 생기가 돕니다. 뜻밖에 춤을 잘 춥니다.


서로 상대가 틀렸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투박하게 떠들지만 잘 해 보자는 마음들이라 웃게 됩니다. 손잡고 춤추다보니 친구가 되었습니다.


눈웃음이 고운 시인의 아내가 호박을 주었습니다. 친구가 생겨서 천금을 얻은 기분입니다. 시월에 열리는 경연대회에 나갑니다. 


부부를 빼고 파트너를 정했는데 원하는 파트너를 맞추느라 선생님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오십 년을 훌쩍 넘긴 파트너,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무용복 샘풀을 보여주었습니다. 물 찬 제비 같은 선생님에게 어울릴 옷인데…. 비만인 내가 입을 수 있을까.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속담을 삶으로 삭혀낸 사람들입니다.


섶 섬의 문필봉을 바라보며 물질하고 검질매서 자녀들을 크게 키워 낸 사람들입니다.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황혼의 사람들, 호랑나비처럼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