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무덤 지키던 석물들, 민속 장식품으로 전락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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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도굴 잇따르며 '석상의 보물섬' 무색
밀반출된 동자석, 전국 개인.박물관 등에 팔려
▲ 석물이 많은 무덤.

 

지금 제주도는 개발의 폭풍이 불고 있고, 그런 만큼 파괴되는 문화의 폐해가 심각할 정도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람의 고향이면서 석상의 보물섬이었던 제주섬의 가치는 끝 가는 줄 모르게 추락하고, 마치 거대한 배가 침몰하듯 제주 섬의 문화는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특히 제주 동자석은 이미 1970년대를 기점으로 대량으로 도굴돼 육지의 저택이나 정원 박물관 등에 민속 장식품으로 팔려 나가 조상의 무덤을 떠나 고향을 그리는 신세가 됐다. 이런 배은망덕한 처사는 산담의 석물이나 돌멩이 하나라도 터부시 여기던 제주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제주 동자석의 중요성을 알고 처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문교 선생이다.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이문교 선생은 1970년대 당시 기자 신분으로 도굴꾼에게 압수한 동자석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집을 만들었다. 제주 동자석의 수난은 그로부터 계속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은 제주 동자석이 인가 가까운 곳이나 깊은 산중이 아니라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 헌마공신 김만일과 그의 부친 김이홍의 무덤 동자석과 문인석이 도굴되었었다. 이날부터 전국을 돌며 도굴된 동자석을 추적한 결과, 약 400여 기에 달하는 제주 동자석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세중돌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이 후 필자의 노력으로 제주 동자석 18기를 찾아올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던 김만일 동자석 2기, 김이홍 문인석 2기를 다시 그들의 산담 안에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듬해 봄, 그 동자석과 문인석은 마치 표적이라도 삼은 양 다시 도굴돼 감쪽같이 무덤에서 사라졌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동자석 도굴꾼들은 훔친 동자석을 주로 배를 이용해 트럭으로 밀반출한다. 이 트럭은 부산을 통해 인사동을 거쳐 다시 각지로 판매가 되는 데, 한번은 오설록뮤지엄 마당에 세웠던 제주 동자석 2기가 청주 한씨 집안의 동자석으로 밝혀져 압수해 오기도 했다. 약 300여 년에서 100여 년의 세월을 두고 만들어진 산담의 석물들은 지금은 만들어지지도 않는 더없이 소중한 귀한 문화유산이다. 여전히 동자석은 도굴에 시달리지만 그 가치를 모르는 문화재 행정은 아직도 뒷걸음질이다.   

 

▲산담 안 석물

 

△문인석
문인석은 말 그대로 문관(文官)의 모습을 만든 석상이다. 석인, 문석, 문석인(文石人), 문관석인, 의관석인(衣冠石人), 관대석인(冠帶石人)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인석은 무관석, 석양, 석호 등 왕릉에서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사대부 무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낮은 벼슬아치 무덤에서, 나중에는 일반 서민의 무덤에까지 세우던 석상이다. 말 그대로 문관의 형상으로 왕을 배알하듯 무덤 앞에 서 있거나. 언제라도 묘주의 명령을 받들 것 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제주 산담 안의 문인석은 동자석과 마찬가지로 제주 현무암재로 만들어져 있다. 동자석보다는 어림잡아 1.5배 되는 크기인데 대개가 복두를 쓰고 있다. 문인석은 동자석처럼 마주 보고 서 있으며, 동자석의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무인석의 기원은 신라왕릉에서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고려, 조선에 이른다. 육지의 문관석은 대체로 복두공복상(?頭公服像)이 먼저 등장하고, 금관조복상(金冠朝服像)이 후반에 와서 나타나며, 이후 이 두 형식이 병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대부묘의 복두공복상이 먼저 출현하는 배경은 조복의 착용이 왕 앞에서만 가능하다는 선초(鮮初)의 법령으로 인해 착용이 제한됐지만 고려 말 왕릉의 문인석의 영향과 함께 더욱 자유롭게 입었던 공복이 먼저 문인석에 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16세기 후반 금관조복상의 유행과 더불어 두 형식이 병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복두공복상이, 조선 후기에 와서는 금관조복을 입은 문인석으로 차차 변화해 갔다. 그러나 제주의 문인석은 거의 고려시대 복식인 복두공복상으로 만들어졌다.

 

△동자석
제주 동자석은 여러 종교가 접촉·결합되었는데 불교, 무교, 도교, 민간신앙의 요소가 반영되었다. 제주의 동자석은 유교문화의 중심권에서 잉태되었으나 지역의 독특한 풍토와 여러 신앙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졌고, 경제적인 여건이 좋은 집안을 중심으로 제주의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 무덤 조각의 하나다.


동자석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는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형상이다. 동자석은 동제석, 동자(아래아)석, 동주석, 동제상, 애기동자, 자석 등으로 제주도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부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자석’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유교 문화에서 출발한 동자석의 시대적 편년은 고려 시대에는 문인석만 이었으나 조선 시대 전기부터 동자석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시기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발흥기(17세기), 융성기(18~19세기), 쇠퇴기(20세기~1970년까지), 소멸기(1970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동자석은 영혼을 위해 예를 갖추는 석상으로 그 기능을 살펴보면 배적 숭기능, 봉양적 기능, 수호적 기능, 장식적 기능, 주술적 기능, 유희적 기능이 있다.


동자석의 형태는 동남형(童男形), 동녀형(童女形), 금수형(禽獸形)이 있고, 내용에 따라 문자형(文字形), 기물형(器物形), 기하학 무늬형, 배례형(拜禮形), 무사형(武士形), 의례형(儀禮形), 해학형(諧謔形)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자석의 양식적 변천을 살펴보면, 원통형 동자석은 편년이 오래된 발흥기의 동자석이다. 반원형은 앞면은 부드럽게 각이 지고 뒷면은 반원형이거나, 앞면은 반원형이고 뒷면은 각진 동자석으로 융성기의 동자석이다. 각주형은 쇠퇴기의 동자석으로 사각기둥 형태이거나 민머리가 많고 조형성이 떨어지고 거칠며 표현이 조악하다.


동자석의 크기는 보통 지상에 세웠을 때 40㎝~90㎝ 정도이며 땅속에 묻힌 정도가 10㎝~20㎝가 된다. 동자석의 비례는 2.5등신에서 4등신으로 얼굴 부분이 전체 몸보다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동자석은 일반적으로 제절 아래 하계에 세운다. 기본적으로 동자석 2기를 세우는 경우와 비석, 동자석, 망주석을 같이 세우는 경우, 그리고 비석, 동자석, 문관석, 망주석 등의 순서로 세우기도 하지만 순서가 다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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