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산담의 기원, 흙과 돌을 날라 부모의 무덤을 보호하다
(5)산담의 기원, 흙과 돌을 날라 부모의 무덤을 보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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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영목장이 운영되는 등 예로부터 들녘과 말과 소를 많이 키우던 제주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방비책으로 돌을 쌀았다. 사진은 우마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산담 모습.

고려시대의 묘제는 대체로 석실묘, 석곽묘, 토광묘, 석관묘 등으로 분류한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묘제와 동일하거나 이를 승계한 석실묘, 석곽묘, 토광묘가 사용되었다. 제주인 경우 고려, 조선 초기에 걸쳐 고조기. 傳김수 장군, 김윤조 등의 방묘가 오늘에 전해 오고 있다. 제주의 산담을 이해하려면 제주의 목축문화와 조선 성리학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조선의 국영목장 설치
목장은 말의 생육을 위해서 넓은 초원을 필요로 한다. 조선의 각도에 목장을 설치한 이유는 섬에는 농경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말에 대한 필요성은 국영목장의 설치라는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조선이 필요한 운송용 말의 수요나 병난을 대비한 군마 외에 명나라의 말 요구 또한 말 수요를 증가시켰다.


제주인 고득종(高得宗)은 말 수요에 대한 대비책으로 한라산에 국영목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방안으로 ‘한라산(漢拏山)가의 사면(四面)이 약 4식(息)쯤 되는 면적의 땅에 목장(牧場)을 축조(築造)하여, 공사(公私)의 말을 가리지 말고 그 목장 안에 들여보내어 방목(放牧)하게 하고, 목장 지역 안에 살고 있는 백성 60여 호는 모두 목장 밖의 땅으로 옮기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고득종의 목장의 축조 후 5년이 지나자 목장을 구분한 돌담 때문에 말의 양육이 나빠지자 가을철이 되면 목장용 돌담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목장을 허물게 되면 밭의 피해가 예상되자 밖의 돌담은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에게 스스로 밭머리에 돌담을 쌓도록 했다.  


유추해보면 목축을 위해서 목장의 돌담을 허물자 농부들이 밭머리에 돌담을 쌓게 하여 마소의 피해를 줄이기도 하거니와 무덤 또한 산담이 없으면 무덤에 자란 풀을 먹으려는 마소 때문에 무덤이 당연하게 훼손될 것이다. 아무튼 무덤은 목장에 안에 있거나 밭머리에 있으면 돌담으로 울타리를 들러 마소의 침입을 막았다.  
 

▲ 산담 안에 들어간 말

▲산담의 시작, 효를 위한 토석영총(土石營塚) 
물론 조선조에 와서 시작된 최초의 산담 형태가 지금의 등변 사다리꼴의 산담이 아니겠지만, 비록 그 규모가 작거나 원형, 아니면 사각형과 유사한 형태일지라도 무덤 주변에 잡담형태로 두른 것만은 확실하다. 이의 증거가 되는 용어가 바로 ‘토석영총(土石營塚)’이다. 즉 흙과 돌을 날라다 흙으로는 봉분을 쌓았고 돌로는 봉분을 보호하는 산담을 둘렀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12년(1430) 병오(9일)일, 제주에 사는 전 교도(敎導) 양심(梁深)이 아버지가 죽으니 여묘(廬墓)하여 예를 다하였습니다. 또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또 여묘하려 했는데 형제 친척들이 집이 가난하니 이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이를 듣지 않고 몸소 토석을 지어다가 무덤을 만들고(土石營塚), 소상, 대상, 담제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하여 지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을 통해서 조선 초기에는 유교식 상·장례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가례(家禮)’의 시행이 지방 관리들을 중심으로 점차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교도(敎導) 출신 양심(梁深)이라는 자와 부사정(副司正) 김비(金庇)라는 자가 ‘토석(土石)을 몸소 지어다가 무덤을 만들었다(營塚)’는 사실은 기록상 제주 산담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담은 15세기 초반부터 출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산담은 정확하게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졌을까?
‘제주읍지(濟州邑誌)’, ‘대정현지(大靜縣誌)’, ‘풍속(風俗)’조에 따르면 산담은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가 돌로 담장을 쌓는데 우마와 들불을 방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영을 위해 제주도에서 조사를 벌였던 마수다 이치지는 “돌담은 단지 인가 뿐만 아니라 밭과 논에도 있으며 무덤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 때문이기 보다는 우마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제주도에는 1931년 12월 말 현재, 소 4만 9백 24두와 말 2만 2천 2백 50두의 말이 방목으로 키우고 있다. 당국은 우마의 기록부에 목우 6만두, 목마 4만 5천두로 추산하고 있다. 이 수는 전체 조선의 우마의 36%이고 말은 북제주, 소는 남제주가 탁월한 상태이다.이 돌담이 지켜지면서 밭 9만3천9백49.2정보, 논 9백57.1정보, 합계 9만 4천9백6.3정보의 경지가 펼쳐져 있다. 제주도 인구 약 20만 명이 먹는 조가 14만 9천1백8석, 보리(大麥)가 26만 1천8백90석, 논벼(水稻)가 1만2백34석, 밭벼(陸稻)가 1만4천5백76석이 주된 식량이다.”라고 했다.    


한학자 이응호(李膺鎬, 1871~1950)는 산담을 쌓는 이유를, “무덤에 세 가지 걱정이 있으니 야화(野火)가 미치기 쉬운 것. 우마가 짓밟는 것, 경작하는 것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니, 돌을 쌓는 것은 그 때문에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산담은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돌담이다. 제주는 예로부터 자연 목장이 많다보니 마소(馬牛)들이 목장의 무덤을 훼손하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담을 쌓게 된 것이다. 또 화전 때 무덤에 불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돌담을 두르게 된 이유도 있다. 그리고 경작지에 있는 무덤인 경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밭을 갈 적마다 묘지의 면적을 점점 갉아먹어 봉분이 위태롭게 되어가자 하나의 방편으로 산담을 쌓아 무덤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 


경작지에 무덤을 조성하는 경우는 육지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제주에서는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어서 종종 자신의 밭이나 친·인척의 밭에다 무덤을 조성한다. 친·인척의 무덤을 조성할 경우 무덤을 쓰는 댓가로 약간의 터 값을 보상한다.


이 전통에 비추어 보건데 이렇게 밭에 무덤을 조성하는 것은 조상의 무덤을 거의 일상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에게 밭은 삶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죽음의 세계로 가는 안식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 곳에 자신이 손수 묻은 조상이 있고, 효를 위한 곡식이 있고, 마지막 자신이 묻힐 빈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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