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에서
남이섬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고재건/수필가

남이섬의 새벽은 풋풋하다. 일찍 일어난 아들이 아침 물안개를 보러 가자기에 따라 나섰다. 강가로 들어서자 이른 아침인데도 관광객들이 짝을 이루어 걷고 있다. 강가를 구경하려면 통나무 꼬불길을 건너야 하는데, 이곳은 그 환경이나 분위기가 육지와는 사뭇 다르다. 사면이 강으로 둘려 싸여서인지 멀리서 볼 때에는 외로움이 깊어 보인다.


십리쯤 떨어져 있는 작은 산의 허리는 안개에 휩싸여 있다. 강변에는 나뭇잎들이 이따금 바람에 흔들릴 뿐 강물조차 정적 속에서 흐른다. 거울 같은 강물의 수면에는 주변의 산과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반사된다. 나무로 얽어맨 통나무 꼬불길은 어른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자연친화적인 길이라 청설모, 다람쥐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사슴이나 토끼들도 제 세상을 만난 듯하다. 오늘 아침엔 타조와 공작까지 함께 어울리고 있어서 아침 풍경이 에덴동산 같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이 말을 걸어온다. 호젓한 길에서 오랜만에 아들과 나누는 대화는 가슴을 들뜨게 한다. 얼마만인가. 직장에서의 고충과 보람, 아이들을 키우며 생긴 일, 그리고 운동과 독서에 관한 대화가 줄을 이었다. 만날 때마다 나누었던 내용들이지만 분위기 탓인지 한결 따뜻하게 들린다.  


흘러가는 아침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앞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뒤에서 흘러가는 강물이 다르며,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르다는 가르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인생이란 일기일회(一期一會)로 펼쳐진다는 뜻이리라. 지금 이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오늘 아들과의 만남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라산을 함께 오른 적이 있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희망하는 대학이나 전공분야는 정해졌지만 성적이 따르지 않아서 힘들어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찍은 아이의 사진엔 웃음이 없다. 다행히 아이는 그 고비를 넘기고 10년 이상을 고생하더니 의사가 되었다.


두 시간쯤 걸었더니 다리가 뻐근해온다. 강변도로의 종점을 돌아 이 섬의 중앙으로 통하는 메타세콰이어 산책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곁에 있는 은행나무길이나 잣나무길, 굴피나무길보다 웅장하고 이색적인 맛이 난다. 아름드리의 굵직한 나무들이 삼백 미터쯤 되는 길 양옆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나무의 키가 하늘로 치솟으니 거리는 늘 그늘로 어둑하다. 길 폭은 대여섯 명이 팔을 벌려야 닿을 정도로 넓다. 날이 밝아오자 드라마“겨울연가”의 촬영지답게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남이섬은 한 선각자가 60년대 초에 개발을 시작하여 반세기만에 불모지를 이국적인 휴양지로 바꿔놓은 섬이다. 땅에 어떤 힘이 있어 저렇게 큰 나무들을 키울 수 있을까. 작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큰 나무가 된다는 성경구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땅도 좋은 땅이지만 이곳에 씨를 뿌리고 가꾼 사람도 그 못지않을 것이다.


메타세콰이어의 길은 흙길이어서인지 신기하게도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로워 보인다. 대부분 해맑게 웃는 모습들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되찾은 느낌이다. 도시에서 살며 쌓인 스트레스도 말끔히 비운 얼굴들이다. 식당과 커피숍, 가게 등도 큰 키의 나무들 사이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서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앞서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간다. 저 아이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에 쓸쓸한 바람이 인다. 그래, 인생은 일기일회이다. 그 말뜻을 곱씹으며 시선을 하늘로 돌리자 길가에 줄지어 서있는 메타세콰이어의 대열 위로 한 무리의 구름이 흘러간다.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강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하늘은 청명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