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공격과 방어의 구심점이 된 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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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에 3개의 성문 설치...일제가 모두 허물어
▲ 일제시대인 1910년 제주성 남문과 문 위에 있는 정원루 모습.

성문(城門)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공격과 방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적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해야 하므로 요충지에 성문이 설치됐다.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한 건축물을 문루(門樓)라 하며 유사 시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됐다. 문루는 적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감시초소 기능을 하면서 초루라고도 불렸다.

제주성에는 남문·서문·동문 등 3문이 이었다. 성의 북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외적이 해안을 통해 곧바로 침략할 수 있어서 북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각 성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남문(정원루)=남문은 1512년 김석철 목사가 지었다. 문의 문루는 정원루(定遠樓)라 명명됐다. 김 목사는 성의 방비를 위해 해자와 판교도 설치했다.

남문과 정원루는 1705년 송정규 목사가 개축했고, 1780년 김영수 목사가 중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남문만 소개하고 동·서문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3문 중 남문은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8년 일제에 의해 정원루가 훼철되면서 3문 중 가장 마지막에 헐렸다.

남문을 헐어낸 자리에는 현재 도로가 뚫리고 아파트 등 건물이 들어섰다.

제주시 삼도2동 남문로(남문사거리)는 남문이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남문로~중앙로 구간은 1980년대까지 제주의 중심 상권이자 번화가였다.

 

▲서문(백호루·진서루)=서문은 지금의 삼도2동 제주은행 서문지점 일대에 있었다. 문루의 옛 이름은 백호루(白虎樓)로 명명됐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수호신이 있듯이 백호는 동서남북 방위 중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서문은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739년 조동점 목수가 중수했고, 1773년 박성협 목사가 다시 지었다.

박 목사는 백호루를 진서루(鎭西樓)로 개칭한 후 친필로 편액을 썼다. 서문과 진서루 역시 1914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서문이 있던 서문통은 1967년 시외버스터미널과 함께 도깨비시장이 있어서 유동 인구가 많았으나 지금은 상권이 크게 위축됐다.

제주도는 2011년 제주목 관아와 연계해 진서루 복원을 추진했으나 도로와 사유지가 있어서 사업이 중단됐다.

 

▲ 일제가 1914년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며 촬영한 제주성 동문 밖에는 돌하르방 4기가 들어서 있다. 돌하르방 뒤편에는 성담이 견고하게 구축돼 있다.

▲동문(제중루·연상루)=제주지방기상청 인근에 있던 동문의 문루명은 처음에 제중루(濟衆樓)라고 했다가 나중에 연상루(延祥樓)로 바뀌었다. 1565년 곽흘 목사가 동성(東城)을 확장하면서 창건했다.

1666년 홍우량 목사가 보수했고, 1808년 한정운 목사가 중수했으며, 1856 채동건 목사가 개축했다. 동문과 연상루는 1914년 허물어졌다.

동문 앞에 있던 돌하르방 8기는 제주도청(2기), KBS제주방송(2기), 제주대학교(2기), 서울 국립민속박물관(2기) 등지로 흩어졌다.

한편 동문시장 동남쪽 언덕에는 운주당(運籌堂)이 있었다. 이곳은 유사 시 목사가 제주성을 총지휘했던 곳이다.

1565년 곽흘 목사가 동성을 확장하면서 높은 언덕에 장대를 축조하고 2년 뒤에 운주당을 건립했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했고 1892년 화재로 소실되자 찰리사 이규원이 재건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상태다.

제주시는 2013년 제주성 정비 활용계획을 수립해 성문과 문루 복원, 옛길 활용 등 다양한 사업을 제시됐지만 막대한 예산 및 사유지 매입에 난항을 겪으면서 지지부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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