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500년 최고의 관아건물 근대교육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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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전패 모신 영주관 객사 학교 건물로 이용
▲ 조선시대 임금의 전패를 모신 영주관 객사가 1910년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학교 건물로 이용되면서 유리문을 단 모습이 눈에 띈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각 지방에 있었던 최상위 건축물이었다.

국권을 상징하는 지방의 최고 성역인 객사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전)’ 자를 새긴 나무패로 왕의 초상을 대신했다.

객사는 또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돼 객관(客館)이라고 불렸다.

경래관(京來官·중앙관리)이 지방 순시 때 접대를 하는 영빈관 기능을 한 것이다. 관리는 이곳에 머물며 왕명인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했다. 이 외에 경로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도 이용됐다.

객사는 지방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부산 동래부 객사는 봉래관(蓬萊館), 평안도 순안 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전라도 나주목 객사는 금성관(錦城館)으로 불렸다.

제주목의 객사는 제주의 또 다른 이름인 영주(瀛州·신선이 사는 곳)를 차용해 영주관(瀛州館)이라 불렸다.

영주관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1416년(태종 16)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등 3읍제로 행정 체제가 개편될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시는 2012년 발굴 조사를 통해 제주북초등학교와 옛 전매청(담배인삼공사)에 걸쳐 있었던 영주관 객사터를 확인했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지붕을 한 가운데에 마루로 된 정당(正堂)을 두고, 그 좌우에는 온돌을 들인 익실(翼室·좌우날개 건물)이 있었다. 전면에는 중문과 외문, 측면에 행랑채 등이 딸려 있었다.

정당에는 전패를 모셨고, 익실은 관리들이 숙박하는 부속건물로 이용됐다.

 

▲ 제주시가 영주관 객사 대청을 복원하기 위해 옛 사진과 문헌을 토대로 설계한 도면.

영주관은 건립 이래 수차례 재건축이 이뤄졌다. 1689년(숙종 15) 이우항 목사가 개축했고, 1706년(숙종 32) 이규성 목사의 중수를 거쳐, 1803년(순조 3)에는 판관 조경원이 중수하면서 제주도 최고의 관아 건물로 위상을 지켜왔다.

그러나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전국의 객사는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일제는 왕에 의한 지방 통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국권의 성역이었던 객사를 학교 등 다른 용도로 이용했다. 또 객사 터 일부를 분할해 도로에 포함시켰고, 일본인들의 주택으로 불하했다.

이 같은 전용행위는 1907년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는 형식으로 추진됐다.

500년 넘게 유지됐던 영주관은 1907년 철폐되면서 왕권 기능이 약화됐지만 근대 교육의 시초가 됐다.

1905년 목사제가 폐지되고 1906년 초대 제주군수로 부임한 윤원구는 신교육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영주관을 교사(校舍)로 이용해 1907년 5월 4년제 제주관립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제주 최초의 근대식 학교가 창설됐다. 영주관에 들어선 이 학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지닌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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