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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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수필가

꽃들이 돌아간 자리. 무성한 초록위로 낙화의 잔흔이 아련하다.


지난밤 돌풍과 함께 쏟아진 비로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화분들이 깨지고 맷돌 위에 놓였던 몽돌 무더기엔 나뭇잎이 엉키고 흙먼지 범벅이다. 몽돌을 씻기로 했다. 먼저 맷돌 위에 가지런히 올렸던 돌 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받침대 맷돌을 솔로 닦고 내려놓은 몽돌을 하나씩 씻다,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또렷한 돌에 시선이 꽂혔다.


오래 된 기억들이 스멀스멀 말을 걸어온다. 구부러진 골목을 지나 대문을 열면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뭉게구름 둥실한 하늘과 조화롭다. 연초록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잘 정돈된 마당의 잔디위로 늘어진 빨래줄이 검은 금을 그었다. 대문이 보이는 마당 한 끝을 돌담으로 둘러, 부엌문을 열면 마주하는 장독간엔 몽돌들이 곰비임비 깔렸다. 그 몽돌 위에 앉아 무말랭이를 말리고 마늘을 까며 담 구멍으로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님의 하루가 곤고하다.


온종일 사람이 그리운 고향집. 주인의 손길이 머물던 장독대에 햇빛 한 조각 내려앉는다. 어른 손바닥 만 한 몽돌들은 김장철이면 김칫독 속에서, 마늘장아찌 자리돔 젓갈 단지 속에서 곰삭아졌다. 어디 그 뿐이랴. 어쩌다 배앓이 기색이 보이는 식구에게 구운 몽돌을 수건으로 꽁꽁 싸매어 건네주시던 따뜻한 얼굴이 보인다.


해묵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기억의 반추를 통해 추억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더욱 또렷한 현재가 된다. 어머님 가시고 말끔히 치워진 고향집에 들어서던 날의 허허로움이라니…   주인 잃은 물건들이 주검 되어 속수무책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시누님들이 어린 올캐를 위한 배려였겠지만 유품정리를 함께 못한 죄송함이 컸다. 빈집 구석구석을 살피다 마주 한 것은 유일하게 몽돌 뿐 이었다.


그 후 돌들은 우리식구와 함께 두 번의 이사를 함께 했다. 옥상 마당에서도 김장철이면 어김없이 소금 뿌린 배추위에 몽돌이 올라갔다. 항아리 가득했던 배추가 야들야들  절여지면 어머님의 담백한 김치가 떠올라 저절로 입안에 군침이 돌곤 한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몽돌 대 여섯 개는 조리용으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맷돌위에 조신하게 쌓아놓는다.


겨울이 지나 볕 좋은 봄날 마당 한쪽에 돌들을 깔아놓고 앉아 햇빛 바라기를 할 때면 따스한 촉감의 몽돌이 저절로 손안에 쥐어졌다. 돌들은 어머님이 이승에 남기고 간 두레박처럼 숱한 그리움을 길어 올린다.


"얘야 오늘은 셋집에 제사 보러 가야한다." 구순의 나이에도 집안 대소사를 챙기시던 어머님의 생생한 모습에 몽돌이 생명처럼 느껴져 온다. 어느 먼 지심에서 뜨겁게 굽이치다 한라산 계곡을 지나 외도천의 급한 물살에 깎이고 닳아지며 인내해온 몽돌. 대를 이어 살아온 고향집 장독간에 온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혹 시어머님의 어머님이신 시할머님께서 마을 앞바다 알작지에서 건져 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억의 실꾸리를 가늠하다 시원의 시간 속 인연을 헤아린다. 오랜 세월 몽돌이 겪은 묵상의 고통은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한 담금질인가. 돌들이 우주 생명력의 한 부분으로 다가와 겸허해진다.


억겁의 시간 속에 찰나적인 삶. 숨 탄 모든 것 뿐 아니라 하찮은 사물과의 귀한 인연을 사랑하리라. 누구나 마음속에 추억을 간직하고 사는 법. 내 어린 날 잃어버린 기억은 얼마인가. 소중한 인연의 끈을 늘려, 마음 한 켠에 아름다운 추억의 풍경을 그리고 싶다.


씻어 놓은 몽돌 몇 개를 바닥에 늘어놓고 맨발이 된다. 추억이 깊은 물건과 추억이 깊은 사람들이 늘어간다. 돌 하나하나에 발 지문을 찍으며 오늘도 인연의 먼 추억을 불러 교감을 시작한다. 박제 되었던 시간의 초침이 생生, 생生,히 째깍 인다.


영생불멸永生不滅.


누군가의 가슴에서 마중물로 추억되는 삶을 생각한다.


한라산이 구름 속에 희미한 산수화로 보이더니 검푸른 모습으로 다가섰다.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대문 밖에서 우리들을 배웅하시던 어머님 모습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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