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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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제주문화연구소장)

산담은 제주의 영혼이 깃든 곳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공간이다. 망자와  살아 있는 사람 사이에 맺었던 인연을 이어가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짧든 길든 한 생애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다. 산담은 또한 제주 돌문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시화와 무차별적인 개발로 산담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에 산담을 제주의 유산으로서 보존하고,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 산담은 제주의 영혼이 깃든 곳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공간이다. 또한 제주 돌문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사진은 제주지역의 한 묘지 모습.

▲사람, 기쁨과 슬픔의 실체


인생이란 “어두왁 악 잠깐인다”.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은 인류 전사(全史)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의문 중 하나일 것이다. 고갱의 대표작 역시 이 질문과 유사하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철학의 문제든 종교의 문제든 간에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의문에 충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물음은 영원히 해답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의 운명적 공명(共鳴)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의 가치가 중요한 만큼 죽음의 무게 또한 큰  짐으로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더욱 천착(穿鑿)하게 되고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현실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삶이 가져다주는 희열을 맛보기 위해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 낙심하거나 절망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이다. 삶의 빛이 강렬할수록 죽음의 그늘은 더욱 짙게 드리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의 과정 속에서 의례를 중시하며 존재의 슬픔을 여과시킨다. 슬픔을 기쁨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의례를 통해 정화되고, 오래도록 기억되기 위해 기념되기를 원한다. 


산담은 죽음을 오래도록 기억해달라고 하는 것은 산 자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을 때의 소망에 불과하다. 죽은 자는 단지 산 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영상일 뿐 그것은 분명 봄날에 아지랑이 같이 잠깐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환영(幻影)과도 같은 것이다.

 

꽃은 봄에 다시 피지만 한번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숱한 장송곡에 등장하는 ‘황천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의 저승’ 이라는 인생무상의 의미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들  존재의 슬픈 상징이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하다. 모든 인간은 ‘녹수청산 험한 길에 홀로 가는 저 나그네’가 된다. 어디 인간 만이랴. 만물이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은 다른 물질로 살아가야 하는 죽음의 새로운 순환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며 나아가 우주의 원리다. 하지만 죽음 저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도, 죽음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는 것도 역사 이래 종교와 철학이 추구하는 다양한 견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뉴는 “죽음은 존재의 조건이자 일부이고, 우리의 현존재란 죽음과 삶의 공유물이고, 우리 삶의 거둔 성과는 결국 죽음에게 바쳐 진다” 고 했다. 이런 생각은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인식을 낳았다. 또,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죽음이란 개별자인 자신의 것이고 인생의 최종 현상일 뿐 인생 너머의 다른 자신의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과 더불어 끝나며 알지 못하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삶의 현상으로써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며 무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이다’ 


나면 죽는다는 진리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적용됐다. 인간은 다양한 의례를 통해 죽음에 대한 의례를 행하고 다양한 장법을 구사한다. 죽음에 대한 상징물을 제작하고 장송의 춤과 노래를 창작한다. 이처럼 인간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은 도구의 제작에 있다. 물론 침팬지와 같은 몇 몇 동물들은 자연 상태에서 적응하기 위해 간단한 도구를 사용 할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생각의 힘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물은 인간처럼 화학이나 물리학을 응용한 기술적 능력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며, 죽음에 대해서도 인간처럼 무덤을 만들거나 그것의 의례를 행하지도 못한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도 삶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삶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했다. 사실상 삶과 죽음은 존재라는 하나의 몸에 자라는 쌍두아가 아닌가. 나면 죽어야 하는 이치는 주검이라는 무생명의 육체를 지상에 남겨둔다. 주검에 다시 산자들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형식이고 그것에 영원한 기념성을 담고자 하는 것이 제의이고 그 제의는 바로 산 자들의 비극적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변화의 실체, 생과 사


사람들은 오늘도 장수를 꿈꾼다. 삶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운 삶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에는 슬픔도 함께 온다. 스스로 내 육신, 내 영혼을 맘대로 어쩌지 못하는 우리 인생의 비애는 장수에 대한 염원을 더욱 부채질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시간은 마치 아침 바람 일듯 급작스레 불어와서 잠깐 내린 한 주제 소나기처럼 존재의 순간만 보여주고 마른 대지로 급히 스며드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애락(哀樂)과 번뇌의 근원이기도 하다. 


제주도민요 ‘용천검’에도 인생 시간의 안타까움을 한탄하고 있으니 “인생 일장춘몽인데 놀기나 하면서 살아나보자. 세상천지가 넓다 해도 요 내 몸 묻힐 한(아래아) 곳도 없구나.” 라고 하여 제주 사람들의 공허한 인생무상을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인생에서 영화(榮華)란 인간이 바라는  로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나없이 그 좁은 문을 향해 불나비처럼 달려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니 그것이 지나고 나면 쇠락하는 인생의 그림자만 쓸쓸하게 남겨진다. 우리네 인생이란 꿈과 비교되기도 한다. 한창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있다가 불현듯 꿈을 깨고서야 그것이 비로소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장자는 “도(우주의 이치)란 시작도 끝도 없지만 만물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고 했다. 즉 이런 삶과 죽음에는 시작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변화’만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다. 다 지나간다. 내가 지나가면 새로운 것이 오고, 간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만물의 실체다. 하나의 실체는 우주적 존재의 얼굴이다. 존재의 얼굴은 존재의 에너지에 비례해 소멸된다. 만물의 실체는 생성과 존재의 운동이다. 금번 ‘산담기행’ 은 산담을 문화론적으로 확장한 삶과 죽음에 관한 제주인의 생사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주인의 삶을 알려거든 제주인의 죽음에 대한 의례와 풍속에 다가서야 하기 때문이다. 급속도로 사라지는 제주 문화의 한 복판에 산담이 있는데 내일, 그 산담이 사라지면 제주인의 삶의 역사도 다시 써야 한다.

 

김유정 작가 누구인가

김유정 작가는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했으며 부산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예술학을 전공했다. 현재 제주문화평론가협회 소속 미술평론가, 이중섭미술관 운영위원으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 '아름다운 제주석장 동자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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