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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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수필가

봄이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날이었다. 결혼하여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떠나왔다가 다시 찾아가는 길에는 또 다른 시작을 향한 꿈이 깔려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창가의 목련은 옛 주인을 만난 놀라움에 웃음을 날리고, 저만치 울담 아래 수선화는 꼿꼿하게 뻗어 올린 줄기 끝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아는 체를 했다. 또 마당 한 쪽 꽃밭에는 꽃봉오리를 내밀기 시작한 모란이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아! 너 살아있었구나. 고맙다.”


중3 때 교실 후면에 붙여 놓고 친구들과 암송하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기억하며 학창 시절을 떠올리기 위해 나무 시장에서 사다 심은 것이었다. 오랜 세월을 잘 견뎌 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미안함마저 몰려왔다. 지난날 추억을 심어 놓은 마당 구석구석에서 기억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어렵게 구하여 심은 석류나무는 태풍에 꺾였는지 밑동만 남아 있어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들이 자랄 때,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과정을 관찰하며 일기나 동시의 글감으로 삼았던 나무다. 사람이 가니 나무도 갔는가. 희망의 노랫소리가 들리던 정원은 적막하고 쓸쓸하였다.


마당 중앙에는 안경 모양의 연못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남편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여름방학 내내 만든 작품이다. 흙을 파내고 벽돌을 쌓으며 서툴지만 콘크리트 일도 손수 하면서. 고모 집에서 분양해 온 연꽃과 부들도 심었다. 분수를 틀어 금붕어를 풀어 놓자 손뼉 치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남편의 모습도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연못 안에 바람 한줄기 스며들자 다 잊었다던 그리움이 절절하게 가슴에 젖어 들었다.


연못가에 들어서자 ‘별 삼형제’란 동요가 되살아났다. 6·25전쟁으로 피난 온 서울할머니한테서 배운 노래다. 별에게도 형제가 있고 눈물도 흘린다는 노랫말은 별에 대한 신비로움과 동경심을 불러 일으켜, 초등학교 1학년 꼬마는 그렇게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 처녀시절에는 지상의 별이 되어 아름답게 빛나 보이고 싶었던 꿈으로 내 가슴은 벅차올랐고, 엄마가 된 후에도 그 꿈을 접지 못하고 연못가를 자주 서성이던 내 영혼은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 ‘나는 왜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연못에 고인 별빛이 슬픈 표정을 짓던 밤의 내 영혼은 미지의 세계를 떠돌다 지쳐서 돌아오는 보헤미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 책장의 시집에서 신경림의 시 ‘갈대’를 만났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삶이 조용한 속울음인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그 고통이 혼자만 겪는 아픔인 줄 알고 가슴앓이를 했었다.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기장에 긁적이며 슬픔을 도피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 시를 만난 후 내 영혼의 방황은 멈추었으며 고통과 시련이라는 어둠이 있어야 내 삶의 별을 바라볼 수 있음을 늦게야 깨달았다.


현실과 이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흔들리던 나를 기다려 준 남편을 향한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도 떠올랐다. 진정한 사랑은 추억 속에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뇌했던 시간도 무념의 마음으로 돌아보니 다 아름답고 그립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다 석양빛에 물든 한담 해변에 들러 바다 건너에 사는 자식들에게 요즘 한림 집을 손보느라 바쁘다고 했더니, “엄마, 연꽃 지금도 살아있어요?” 맨 먼저 묻는 말이다. 아이들 모두 사십을 넘기고 보니 고향집에 대한 향수도 커지는가 보다.


젊음의 흔적이  묻어 있는 옛집에서 별빛을 노래하며 살고 싶다. 


밤하늘이 말해주는 것을 맑은 영혼으로 받아쓰면서, 마음의 글밭을 가꾸노라면, 못다 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꿈은 다시 피어나겠지.


오늘 밤도  별빛이 가득할 추억의 마당을 가슴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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