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제주목사 청백리와 탐관오리는?
(2)제주목사 청백리와 탐관오리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선정 베풀어 칭송 자자...폭정으로 원성 사기도
▲ 제주목 관아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제주목사의 모습을 재현한 모습.

286명의 제주목사 중 58명(30%)은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반해 14명(5%)은 탐관오리로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졌다. 정치를 잘못한 목사도 15명으로 꼽혔다. 반면, 기건, 이약동, 이수동 목사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기건 목사(재임 1443~1445)는 겨울에도 알몸으로 물질하는 해녀를 안쓰럽게 여겨 평생 전복과 미역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또 나병(한센병) 환자를 위해 해변에 격리치료시설을 설치하고 바닷물과 약으로 치료해줬다.

이약동 목사(1470~1473)는 겨울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상에 걸려 죽고 다치는 백성이 나오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하도록 했다.

이임 시 관물과 관복 모두를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관덕정에 기둥에 걸어 놓고 퇴임했다.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이수동 목사(1526~1528)는 민가에서 귤을 징발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별방·수산·서귀·명월 등 방호소가 있는 곳에 과원을 조성해 군인들이 관리하고, 진상에 충당하도록 했다.

허명 목사(1814~1815)는 해녀들이 미역을 캐고 내는 수세(水稅·조합비)를 폐지했다.

채무로 백성들의 반목이 심해지자 법적 보장이 없는 차용문서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줬다.

나아가 이 문서를 태우고 무효를 선언해 민초들을 구원했다. 이 때 부터 효력이 없는 문서를 ‘허명(허맹)의 문서’라 불리게 됐다.

가렴주구와 폭정을 일삼은 목사도 있었다. 1619년 부임한 양호는 탐학이 극도로 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호랑이를 대하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그는 1623년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자 체포돼 사형 당했다.

역사 속 인물들도 목사로 부임했다.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은 1616년부터 3년간 목사로 재직한 바 있다.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을 제압한 남치근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1552년 목사로 부임, 천미포로 다시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웅인 양헌수 목사는 1864년부터 2년간 목사로 재임한 바 있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홍종우는 1905년부터 1년간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김옥균을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은 반면, 학정으로 원성을 불러오기도 했던 제주목사는 1906년 일제의 통감부 설치 따른 목사제 폐지와 1910년 일제강점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관직이 됐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