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 봄 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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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옥 수필가

차를 타고 가다가 서귀포 해안가 삼매봉 마루턱 길에서였다. 관광객인 듯 한 두 여인이 길가 의 절벽 같은 석축을 기어 올라가 때 이른 개나리꽃을 꺾고 있었다. 아마도 봄을 애타게 기다리다 목이 빠져 북녘의 서울이나 그 어디쯤서 날아온 상춘객이려니 생각 했다. 이미 그녀들의 나들복에는 꽃이 무색할 춘색이 담뿍 물들고 있었다. 오죽 봄이 기다려졌으면 보는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상념도 잠깐 ‘아, 어느덧 또 봄이로구나’ 하는 나만의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생로병사 따위의 인간사와는 아랑곳없이 계절의 바퀴는 구르는구나’ 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경외인지 모르겠다. 또는 남의 행불행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저 할 일만 어김없이 챙겨 가는 야속한 이웃을 바라보는 느낌일 듯도 하다.


지난겨울은 유난하기도 했었다. 여느 때라면 동화의 나라를 하얗게 물들여주던 백설 군단이 점령군처럼 이 땅의 산야에 항만에 도로에 밀려와 애써 이룩한 모든 인위를 우습고 헛되이 만들어버렸다. 사십 몇 년 만의 재앙이라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자연의 위세 앞에 나약한 인간은 그저 순응의 교리만을 경전처럼 곱씹어야 했다.


나는 또 하나 나만의 겨울을 맞고 보냈다. 어둡고 추운 터널을 지나보지 않으면 그 겨울이 얼마나 가슴을 누르는 납덩이 겨울인지 모른다.


검은 구름 #타나토스의 그림자가 무언으로 다가와 내 옆구리를 홀치듯 스쳐 지나갔다. 그 경황에 나의 절반을 실은 반야용선은 휩쓸리듯 이승의 언덕에 매인 낡고 삭은 닻줄이 끊겨 피안의 물마루로 가뭇없지 사라져 가 버렸다. 이 아픔을 옛 어른은 ‘내 몸의 절반을 베어내는 아픔[割半之痛]’이라고 너무나 적절하게 말씀하셨다.

 

남의 아픔을 보았을 때 위로의 말로 곧잘 부처님의 법어를 빌려다 써먹던 회자정리(會者定離)’가 나의 경우를 만나서는 그저 공허 또 공허할 뿐, 그보다는 *‘사내 속이라 잊으련만/십 오년 정분을 못 잊겠네’라는 어느 시구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을 어쩌랴. 게다가 같이 해 온 세월을 어찌 십 오년에 대겠는가.


봄, 봄은 꽃이요 꽃 소식의 첨병은 개나리가 아닐까. 그러기에 이 강산에 어서 개나리가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면 그 개나리에 홀린 저 여인들의 탐심을 헤아릴 만도 하다.


그랬더니 요즘 날씨가 심상치 않다. 따스한 햇살이 봄 병아리들을 어미닭의 날개 죽지에서 빠져나와 천방지축하게 하는가 하면 금세 흙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고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붐비며’ 돌아다닌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이런 봄을 봄 같지 않은 봄[春來不似春]이라고 시큰둥해 했던가. 강아지 꼬리 같은 저 개나리에 홀려 성급히 창문을 열었다 황급히 도로 닫느니 좀 더 진득하게 기다려보자는 진중함이렷다. 나 또한 서귀포 알자리동산 양지바른 중턱, ‘이중섭 가’ 뒤란에 고즈넉이 서 있는 두 그루의 백목련이 백설 빛 갑사치마로 성장(盛裝)을 하고 나서기 전에는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이 땅의 봄소식 릴레이의 출발점은 단연 저 백목련이려니 하는 나만의 오랜 신념에서다.


그러기에 아직 나에게 봄은 멀기만 하다. 게다가 나의 봄은 짓궂은 녀석인가 보다. 어디 바닷가 모래밭에서 한판 뒹굴며 싸움질도 하고, 썩은 물웅덩이나 기웃거리며 한눈팔다가 춘곤증에 겨운 하품에 불현 듯 생각나서 그제야 두 세 걸음 떼어놓는 봄, 나를 애타게 하는 봄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봄이나마 기다리는 마음 간절한 것을 어쩌랴.


어서 봄다운 봄, 백목련 갑사치마의 봄, 복사꽃 연분홍 치마가 날리는 봄, 나의 북향 창 안에도 화창한 햇살이 듣는 봄을 기다린다. 오늘도 나는 까치발로 서서 문설주에 귀 대이고 봄 아지랑이 속 먼 산만 바라본다.

#그리스 신화 죽음의 신
*김소월의 ‘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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