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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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옥/수필가

감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매년 이맘때쯤 대하는 천상의 선물이지만 올해는 감회가 다르다. 청아한 자태와 그윽한 향이 범접을 허용하지 않아 나무 사이를 가만가만 걷는다. 노령기가 한참 지난 노목이 그 혹독한 한파에도 수많은 꽃눈들을 숨겨 놓고 다치지 않게 키워낸 그 힘은 무엇일까. 


지난 1월, 수십 년 만에 찾아 온 폭설과 한파는1,000여 평의 월동감귤 비닐하우스를 냉장고로 만들어 버렸다. 온도계는 영하 8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입술이 마르고 애가 타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온대지방이 고향인 감귤 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약하다. 날이 풀리자 나무는 점차 원기를 회복하였으나 이미 속살이 터져버린 열매는 썩기 시작했다. 어쩌랴, 하늘의 뜻인 것을.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모두 따서 버렸다.  


지난 가을 어머니는 설사로 병원에 3주 동안 입원하였다. 설사가 워낙 심해서 입원 내내 기저귀를 차야만 했다. 물도 마시지 못하고 오직 링거에 의지하여 가쁜 숨을 쉬는 모습에 인생의 말로를 생각하며 기저귀를 갈아드렸다. 미라처럼 말라 쪼그라든 체구는 대여섯 살 난 어린애만하다.


어머니는 “늙으민 어린애가 된댕 허는디 나가 똑 그 짝이여, 머리 허영헌 아들이 기저귀를 갈고.”하며 돌아눕는다.


아침에는 왕진 온 의사선생님이 좀 어떠시냐는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딴청만 부렸다.


“식당 문 열었수가? 우리 아들 아침 밥 먹어야 허는디.”


어머니에게는 끼니에 대한 남다른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춘궁기에 양식이 바닥나면 점심은 고구마로 때우고, 저녁은 나중에 일을 해주는 대가로 구해 온 보리쌀을 맷돌에 갈아 나물을 넣고 죽을 쑤어 먹었다.


여름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큰 밥상 두 개를 펴놓고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들,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딸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상에는 큰 양푼에 담은 보리밥과 물외 냉국, 된장과 마늘장아찌 그리고 콩잎과 같은 푸성귀로 상이 그득하였다. 


감귤을 재배하면서 형편도 나아져서 두 분이 마주한 동그란 소반에는 잡곡밥에 육류나 생선이 자주 올랐다. 내가 들를 때면 구운 고등어나 갈치 토막이라도 얹어 밥상을 차렸다.


입원한 지 3주째가 되자 설사는 멈췄으나 음식물 섭취가 힘들었다. 집에 가겠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수십 년 간 살아온 농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살 것 같다’고 했다. 퇴원은 했으나 한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 그러나 봄바람을 타고 매화꽃이 피어날 즈음에 어머니의 원기도 회복되어 혼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본 어머니의 밥상은 동그란 양은 다반에 죽 한 그릇, 간장종지 하나.


“어머니, 밥을 드시지 않고…….”


“죽이 먹고정 허연.”


내일 모레가 백수인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밥상에 어머니의 인생이 차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길고 먼 여행을 준비하는 듯한 어머니의 모습은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서있는 느낌이다.


화창한 봄볕아래 벌들이 감귤꽃에서 꿀을 퍼 나르고, 자식들에게 다 내주고 꿀샘이 마른 어머니는 반평생을 동고동락한 나무들을 사진이라도 찍듯이 살펴보고 있다. 어느 틈에 창고 옆 참새촌에서 놀던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앞장서며 요리조리 길을 안내한다.


“포릉 포르릉 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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