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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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수필가

옷장을 정리한다.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대충 정리한 게 늘 개운치 않았다. 찬란한 봄날을 맞아 세상에서는 꽃들이 향연을 벌이고 있다. 옷 속에 파묻힌 내가 한심하지만, 가끔 옷장을 정리하고 나면 삶이 정리 되는 것만 같아 열심히 손을 놀린다.


옷장 서랍을 열자 어머니의 주름치마가 나온다. 옅은 카키색에 꽃무늬가 가득한 치마이다. 어머니의 분신인 양 반가워서 덥석 잡아본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닿는 촉감이 부드럽다. 꽃 축제도 못 갔는데 뜻밖의 위로가 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주름치마를 슬며시 내밀었다. 그때 병환 중이셨다. 그 옷을 입고 외출하기는 힘들 거 같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어머니가 외출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쪽머리를 하고 자수를 놓은 분홍색 양산을 들고 주름치마를 입으신 어머니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얼마나 고왔는지 내가 보기에는 마치 일류 배우 같았다. 그렇게 즐겨 입던 옷이어서 특별히 딸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 날, 가난한 어머니의 소박한 바람을 마지못해 받아두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외출할 때 마다 불러 세워 말을 걸곤 했다. 혹시 당신께서 준 옷을 입었는지 내심 확인하셨을 것만 같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쓸쓸한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에 비춰본다. 영락없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천륜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어머니가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후회해 보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봄이 왔으나 조석으로 바람결이 차가워 코트를 꺼낸다. 입으려고 보니 단추 하나가 금방 떨어질 듯이 달랑 거린다. 어머니가 물려준 바늘쌈지를 꺼낸다. 그 안에는 단추와 옷핀이 크기별로 가득 들어있었다. 실도 색깔별로 가득했고 바늘도 여러 개 있었다. 금은보화로 넘치는 보석함 같았다. 그걸 모으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통장에 돈을 넣듯이 어머니는 단추를 모은 것이다. 남들처럼 집문서나 땅문서를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 주고 싶은데 내어놓을 게 없어서 허둥댔을 것 만 같다.


우울한 날은 나를 조금 진하게 치장한다. 화장도 짙어지고 액세서리도 달아 본다. 화사하게 꾸며 보지만 왠지 심란하여 자꾸 무언가로 더 채우고 싶어진다. 문득 어머니가 물려 준 자수정 알반지가 생각난다. 얼른 꺼내어 검지에 끼워 본다. 커다란 반지 알이 굵어진 손가락 위에서 도도하게 빛난다. 반지를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도도해 진다. 그것만으로도 잠시 우울한 심사가 치유된 듯한 느낌이다.


언젠가 어머니는 외출하려는 나의 손가락에 반지를 슬쩍 끼워주셨다. 허전한 손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날은 내가 올 때까지 마당가를 서성거리고 계신다. 신나는 일이 생겨 늘 웃음을 지으며 살길 바라셨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계셨다. 그때마다 지그시 바라보던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는 듯도 했다. 


어머니는 늘 내 빈 손과 빈 마음을 어떻게 채워줄까를 고민하셨을 것이다. 이제야 그 깊은 마음속을 헤아려 본다. 반지를 낀 손의 감촉이 좋다. 수많은 세월, 어머니의 허전함을 채워 주었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내리 사랑은 저승에 가서도 이승과 닿아있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가신지 어느새 4주기가 지났다. 그 곳에서도 지상을 내려다보시며 서성이고 계실 것만 같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온다. 아,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신께서 단 하루만이라도 이승으로 건너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 생전에 못 드린 말, 이 한 마디를 꼭 전하고 싶다.


“어머니, 사랑해요”


아직도 옷장 속엔 헝클어진 옷들이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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