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길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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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수필가

다시 맞는 봄날, 멀고 먼 시간을 건너 온 꽃들이 밤낮없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 해 봄에도 꽃은 피었을 터인데, 내 기억 속의 봄날은 쓸쓸한 그림자로 남아있다.


밤낮의 구별이 없는 병동의 아침은 간호사들의 발자국 소리로 다시 시작된다. 약품을 정리해 놓은 수레를 끌고 병실로 들어 온 간호사가, 호흡곤란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산소를 공급하려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입원실은 서서히 뒤척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입원하면서 시작된 병원생활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처음 며칠은 거의 뜬눈으로 지냈다. 근 두 달이 지난 뒤에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서 새벽 무렵에는 늘 깨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여느 날의 새벽과 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끊어질 듯 이어지던 노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순간 울컥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드리워진 창밖은 고요하다. 시계는 십분 전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노인의 침대에 드리워진 커튼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호사에게로 갔다.


어디서 온 누군지도 모르는 한 노인의 죽음을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맞닥뜨린 이 혼란스러움을 어쩔 것인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던 살아있음의 기척이 멈추어버린 그날은 노인이 입원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밤마다 기침을 하던 환자가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자, 한 노인이 들어왔다. 중년의 남자와 함께 휠체어에 앉은 채로 들어 온 노인은 얼굴이 온통 치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눈에도 병이 깊어 보였다. 뒤따라 들어온 담당의사가 어떠시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인 채 가까스로 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입원생활이 시작되면 한 병실을 쓰는 이들 사이엔 동질의 감정이 형성된다.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면 먼저 입원 해 있는 환자의 보호자는 이것저것 알려줘야 하는 의무라도 있는 듯이 친절을 베푼다. 병실로 들어오던 날 방 안에 있던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쏠려서 무안함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애써 무심한 척 얼굴을 돌렸지만 노인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내가 사용하는 침대와 옆자리에 나란히 있는 환자의 침대와는 커튼 한 장으로 구분지어 졌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걸러지지 않고 들리는 거리다보니 쇳소리를 내는 노인의 숨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자연스레 마음이 쏠렸다.


노인이 입원한 지 하루가 지난 오후, 며느리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와 노인의 아들이 왔다. 뭐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통장비밀번호를 물어본다. 답이 없었다. 가라앉은 어조로 거듭 물어보는 자식들과 묵묵부답인 노인. 그들 사이에 무슨 사유가 있어 저토록 야속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마음자리마저 시끄러워진다. ‘나라면 어땠을까. 통장예금의 숫자에 무심 할 수 있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어 말을 잃어버린다면, 내 아이들이 저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허기야 남기고 갈 무엇이 있다고 괜한 걱정 한다손 싶어 머리를 흔들어 보지만, 노인의 바튼 숨소리에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이 도사린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연 이틀 찾아와 노인에게 비밀번호를 받아간 자식들은 그날 이후 볼 수가 없었다.


홀로 가는 길이라지만, 세상을 하직하는 마지막 순간에 손 한번 잡아 줄 피붙이 하나 없었으니 얼마나 황량하였을까….


임종을 지키는 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을 종종 들으며 살지만, 나 또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어쩌자고 눈썹 끝에 달린 일도 모른 채 저만 바라보며 모질게 사는 것인지. 다시 맞은 봄날에 난분분 날리는 벚꽃 그늘 아래 서니, 그날 새벽 노인을 배웅하던 환우들의 한숨소리가 누군가의 메시지처럼 마음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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