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법화사 -해상왕 장보고가 지은 사찰로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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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법화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0여평 규모였다. 사진은 1987년에 새로 불사한 대웅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자리한 법화사(法華寺)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의 말사다.

 

후기 신라시대,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던 해상왕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로 전해진다.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더불어 산둥반도에는 법화원, 제주에 법화사를 창건하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세계로 향하는 해상세력의 근거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법화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해오지 않으나, 1982년부터 8차례에 걸친 발굴로 법화사지의 규모가 확인됐다. 특히 1992부터 1997년까지 발굴된 명문기와를 바탕으로 고찰하면 1269년(원종 10년)에 중창을 시작해 1279년(충렬왕 5년)에 불사를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기록에 의하면 법화사의 노비가 280명에 달해 그 규모가 상당히 컸으리라 추측 된다.

 

당시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약 330㎡ 규모로 파악됐다.

 

이 시기 법화사에는 노비가 280여 명이 있었고, 법화사에 봉안된 아미타삼존상을 명나라가 반환 요구했을 때 이를 전남 해남에 숨기기 위해 만든 감실의 높이와 폭이 각각 7척이었다는 기록으로 봤을 때 당시 법화사의 규모가 도내 최대 규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법화사 경내 남쪽에 조성된 구화루 전경.

법화사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530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법화사의 존재가 나타나지만,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에는 폐사돼 초가 몇 칸만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다.

 

폐사된 법화사터가 드러난 것은 4·3항쟁 당시 중산간 일대 마을이 불타버리면서이다. 법화사터는 1970년 지방기념물 제3-13호로 지정됐다가, 198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1983년에 발굴된 대웅전터에 1987년에 새로 세운 대웅전이 있다.

 

법화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경내에 자리한 구품연지다.

 

이는 본래 불국사 앞마당에 있던 큰 연못의 이름인데, 극락정토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연지를 일컫는다.

 

법화사지의 구품연지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특히 7차례의 사찰 주변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오백나한전 터를 비롯해 여러 동의 건물과 9900㎡ 규모의 구품연지가 실제 존재했음이 확인됐다.

 

법화사는 1987년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2001년에 구품 세계관을 상징하는 구품연지를 복원하며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 2004년에는 구품연지 안에 178.2㎡ 규모의 2층 누각인 구화루(九華樓)를 완공하며 1단계 복원사업을 일단락 지었다. 2007년부터는 일주문·사천왕문·나한전·승방·강당 등을 추가로 복원, 법화사의 옛 모습을 재현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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