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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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수필가

다시 봄이다. 영춘화에 감응한 매화와 목련이 하얀 웃음으로 봄을 맞이하더니 뭇 생명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올려다본다. 가진 것 모두 내주고 맨몸으로 겨울나기를 했던 감나무에도 새움이 돋아나고 있다. 생명의 순환이 신비롭다.


우리 집 앞마당에는 늙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제주 선인들의 노동복인 갈옷에 염색하는 토종 감나무다. 열매 크기가 자두만큼이나 할까. 뒤뜰의 단감을 사등분한 것보다 더 작아서 식용의 가치로 셈하면 벌써 소박맞을 팔자다.

 

그러나 뒤뜰의 단감보다 이 토종 감나무에 더 끌리는 연유는 무엇일까. 울타리 가에 있는 다른 나무, 말하자면 오엽송이나 동백, 소나무와 먼나무 등도 아끼는 정원수들이지만 나는 유독 이 감나무에 매혹된다. 무채색의 겨울에 곱게 익은 감나무의 설경은 언제나 꽃보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짝사랑하게 만든다. 카메라도 그 설경을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지난해는 근래 보기 드물게 감이 많이 달렸다. 늙은 감나무가 무슨 보시를 크게 생각했음인지 여름에는 튼실하게 넓은 잎으로 무성해졌고, 그 잎사귀 사이사이마다 풋감이 땡볕에 탱글탱글 여물어 갔다.


누구의 소문을 들었는지 갈옷공방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 분의 표현대로“감이 지락지락 잘도 열어신게 마씸”하며 감물 들일 풋감을 거래할 수 있는지 물었다. 소싯적에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풋감을 절구에서 빻아 흰 무명옷에 감물 들였던 기억이 아롱거렸다. 풋감의 용처를 모르는 바가 아니나 우리 집 감나무는 겨울에 함박눈이 묻을 때까지 따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엿들었는지 짙푸른 잎사귀가 햇살에 반짝거렸다.


겨울이 되면 감나무는 알몸이 된다. 넓은 잎사귀들을 몽땅 내려놓고 어느 하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떳떳해야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저렇게 벗을 수 있는가. 동장군이 몰려 올 터인데 어찌하여 맨몸으로 맞서려 함인가. 어떠한 권좌 앞에서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선비의 강고함, 소중한 보물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내놓는 청렴함이 엿보인다.


겨울에 폭설이 내렸을 때 잎을 버리지 못하는 상록수들은 온통 눈의 무게에 눌려 신음했지만 때가 되면 버릴 줄 아는 낙엽수인 감나무가 지혜롭다. 추위에 얼굴 빨개진 꼬맹이 감들만이 하얀 눈꽃 모자를 쓰고 앙증맞은 꼬마 산타가 되었다.


감나무가 허기진 겨울새들을 불러들인다. 재잘거리는 귀여운 녹색의 동박새를 비롯하여 몸집이 좀 큰 잿빛의 직박구리까지 감나무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 오종종한 감나무 가지가 그들의 식탁이다. 새들은 영역 다툼을 하지 않고 오락가락 자리를 옮기며 즐긴다.

 

이제 알겠다. 왜 우리 집 토종 감나무가 그렇게 작은 열매를 많이 열리는지를. 뒤뜰의 단감처럼 크면 새들보다 사람의 입에 먼저 들어가기 십상임을 용케도 일찍 알아보았을 터다. 그 많은 생명의 씨앗들을 온전하게 키워내느라 늙은 감나무의 등걸이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그 안에 무슨 젖샘이 있어 저것들이 저리 토실토실할까. 새들은 어찌나 영특한지 잘 익은 감을 식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덜 익은 감에 입질하는 법이 없다. 토종감은 함박눈을 맞으며 고난을 이겨내야 떫은 타닌 성분이 희석되고 홍시의 단맛을 닮아간다.

 

곶감 맛의 꿈을 꾸는 그 세한의 수행이 고독하고 눈물겹다. 그렇게 완숙시키고 나서야 배고픈 생명들에게 기꺼이 보시한다. 육신을 버리는 자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고독한 구원자, 은광연세(恩光衍世)가 연상된다.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으로, 제주에 유배 온 추사가 의녀 김만덕의 덕행을 추념하여 쓴 글귀다. 눈 오는 겨울, 굶주린 겨울새들에게 베푸는 감나무의 초상이 그러하지 않는가.


춘분이 지나 따스해진 봄볕이 나목이 된 감나무의 가지에 내려앉아 소곤거린다. 햇살과 바람과 비의 은덕을 받고 다시 겨울이 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겠지. 공생하는 세상의 미덕이다. 우주의 무슨 설법이 저 늙은 감나무를 저리 거룩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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