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조남수 목사의 생애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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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독교 성지순례길-사명의 길(3코스)
   
          ▲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순례자의 교회’
‘사명의 길’은 제주 기독교 성지순례길 3코스로 가장 기독교적인 행동인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 조남수 목사(1914~1997)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유학을 했고, 1943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해 이듬해 목사가 됐다. 1947년 모슬포교회 8대 목사로 부임했다.

4·3의 발발한 1948년 군·경은 대정읍 출신 좌익 총책을 검거하고, 무장대(산사람)에 협조한 100여 명의 명단을 입수했다.

만주 독립군 출신으로 당시 모슬포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문형순(1897~1966)은 이들에게 자수를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처형될까봐 두려워 아무도 자수를 하지 않았다.

입산한 무장대 중에는 가족과 이웃이 있었기에 쌀과 돈, 옷과 양말을 내준 양민들이 많았다.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자수를 하면 죽임을 당할 것으로 여겼다.

이 때 조 목사가 자수를 권고하는 강연에 나섰다.

그는 문 서장에게서 자수하는 사람은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여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첫 강연에서 자수를 한 100여 명이 처형을 당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자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대정은 물론 한림·화순·중문·서귀포에서 강연 신청이 들어왔다. 150회에 걸친 강연으로 3000여 명이 자수를 해 목숨을 건졌다.

조 목사는 “자수를 했다가 처벌을 받으면 내가 먼저 자결 하겠다”며 목숨을 담보로 한 연설로 양민들을 설득시켰다.

무장대의 협박으로 ‘삐라’를 살포했다가 사형 집행이 확정된 양민 20명은 조 목사가 개과천선에 책임지겠다고 군·경에 애원해 살아남게 됐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물론 도민들에게 귀감이 된 조 목사의 사명감은 ‘사명의 길’로 거듭났다. 길은 한경면 조수교회를 출발해 대정읍 하모리 진개동산 내 조남수 목사 공덕비까지 21.4㎞에 이른다.

4·3으로 소실된 조수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학교를 졸업하고 미술을 공부한 김정기 목사가 디자인을 했다. 교회는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식 양식으로 2008년 재건축됐다.

길을 가다보면 용수리에 있는 ‘순례자의 교회’를 만날 수 있다. 2012년 지어진 교회는 8㎡ 규모로 종탑을 포함해 5m 높이의 목조 건물로 전국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교회다. 어른 다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다.

길은 햇살이 비치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차귀도 앞 바다와 노을이 아름다운 수월봉을 지나게 된다.

세계지질공원인 수월봉은 거센 풍파를 견뎌내며 화산의 기록을 새겨놓은 또 하나의 경이로움을 품고 있다.
여정의 끝은 1996년 하모리에 세워진 조남수 목사 공덕비다. 4·3과 관련,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덕비를 세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4·3평화기념관에는 문형순 서장, 김익렬 9연대장, 김성홍 ‘몰라구장’, 서청단원 고희준씨, 강계봉 순경, 장성순 경사, 외도지사 방(方) 경사 등 일곱 명을 무고한 양민의 학살을 막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소개하고 있다.

반면, 목숨 내놓고 벌인 자수 강연으로 많은 양민을 살려내 ‘한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조 목사는 이 명단에서 제외돼 수많은 원혼들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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