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배중열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이곳의 일상을 그림과 글로 옮기고 있다. 사진은 지난 26일 전시회를 위해 찾은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호텔 대동’에서 만난 배 작가. 박재혁 인턴 기자 tkgkzn@jejunews.com

일러스트레이터 배중열(34)의 인생에서 2012년 여름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다.

 

생활 무대가 회색 빌딩 숲에서 초록 자연의 품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고단하고 팍팍한 일상에 찌들었던 내면에 시나브로 여유와 평온이 스며들었다.

 

그의 삶이 확 바뀐 변화의 계기는 바로 제주 이주다.

 

충북 보은 출신으로 공주대 만화예술과를 나와 서울에서 6년가량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던 작가는 그해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아담한 주택을 빌려 작업을 시작했다.

 

배 작가가 처음부터 제주 정착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28일 전시를 위해 찾은 제주시 원도심의 ‘호텔 대동’에서 만난 작가는 “원래 2년쯤 작업하다가 서울로 돌아가려 했다”며 “그런데 제주에 살다 보니 우뭇가사리 말리는 할머니만 봐도 재밌고 흥미로웠다. 작은 일 하나에도 감사하게 됐고 결국 눌러앉았다”고 전했다.

 

제주의 편안함과 사람들의 인정은 정착 전 5차례 제주를 여행할 때 이미 그의 뇌리에 각인돼 있던 터다. 특히 2007년 자전거 여행의 기억은 선명하고 강렬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다 구좌읍 세화를 지나는데 너무 지쳐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어요. 택시가 없어 한 주민께 공항까지 데려다 주면 돈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분이 트럭으로 제주 곳곳을 관광시켜주고 나서 공항까지 태워다줬죠. 그것도 공짜로요.”

 

제주에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렸는데 푸근한 인심까지 체험했다는 첨언이 따랐다.

 

신촌에서 1년쯤 살던 그는 애월읍 장전리로 작업실을 옮겼다가 올해 봄에 다시 신촌에 있는 단출한 농가 주택을 구입한 후 6개월째 소박한 보금자리로 꾸미고 있다.

 

최근 배 작가는 예술적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주에 내려와 2년 넘게 작업한 그림과 글, 사진을 모아 ‘제주 담다, 제주 닮다’를 펴낸 것이다. “제주를 동쪽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며 동네 구석구석에서 체험한 이야기와 제주에 살아가는 느낌을 담담하게 그리고 썼죠.”

 

책은 제주의 속살을 그림일기 쓰듯 표현한 가운데 저자가 일러스트레이터인 만큼 그림이 지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책장을 넘기노라면 독자는 마치 제주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감흥을 느낀다. 제주를 포착한 어떤 사진이나 영상보다 울림이 깊고 여운은 길다.

 

아무래도 배 작가는 스스로 제주를 닮아가나 보다.

 

“서울에 있을 땐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좋아해 주길 바랐죠. 지금은 제주를 느끼고 공감할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합니다. 제주 일상의 느낌과 이야기를 그리고 쓰는 작업은 곧 제주의 원형질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제주를 색깔로 치면 파랑과 녹색이라고 했다. “바다와 숲, 하늘에 둘러싸인 제주는 파란색과 녹색으로 채색돼 있다. 노을이 질 땐 하늘이 이렇게 예쁘게 물들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한다”며 “고층 건물이 없기에 가능한 치명적인 매력”이라며 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작가는 제주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마을로 구좌읍 한동리와 평대리를 꼽았다. 걷기에 좋고 무엇보다 가장 제주스러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럼 제주스러운 것은 도대체 뭘까. “사방이 탁 트인 시야 안으로 바다와 오름이 들어오고 어디든 맑고 푸른 자연이 곁에 있는 모습이죠. 제주는 보고만 있어도 사람에게 쉼과 안식을 선물해 줍니다.”

 

제주를 향한 배 작가의 애정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는 “카페를 자주 이용하는데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주변에 한 곳도 없어 아주 불편했는데 2~3년 새 신촌과 인근 마을에 대여섯 곳 이상 생겼다”며 “그런데 편리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 제주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누가 뭐래도 제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가 좋아요. 인위적인 구조물이 들어설수록 제주가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제주는 말 그대로 제주스러워야 합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