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유배지서 순교자적 삶을 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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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천주교 성지순례길-정난주길
   
▲ 서귀포시 대정읍 정난주 마리아 묘가 들어선 대정성지에는 십자가상과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1773~1838) 묘에서 출발하는 정난주길(15㎞)은 순교자적인 삶과 유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순례길로 꼽힌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난주는 남편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1801년 관노로 전락, 대정현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남편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 당하고, 두 살배기 아들(황경헌)은 어린 나이를 감안, 죽음은 면했지만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됐다.

그녀는 제주로 유배를 가던 중 아들을 저고리에 싼 뒤 이름과 생일을 적어 추자도 예초리 황새바위에 두고 떠났다.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어부 오씨가 거둬들여 키웠지만 살아생전에 모자는 상봉하지 못했다.

정난주는 귀양살이에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고, 고결한 인품을 보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대정현 관리 김석구는 그녀의 성품을 높이 사서 자신의 집에서 일하게 했고, 별채를 마련해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록 노비 신분이었지만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존경받았던 정난주는 66세에 숨을 거뒀고, 이웃들은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무덤을 마련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그녀가 피를 흘리며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불모지인 유배지에서 순교자적 삶을 살았기에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하고, 1994년 묘역을 단장해 ‘천주교 대정성지’로 조성했다.

순례길의 출발지인 정난주 마리아 묘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보성초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내에는 동계 정온(1569~1641) 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정온은 광해군의 과오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정현에서 1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정난주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840년 당대 석학이던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으로 유배를 온다. 유배기간 9년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했고,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다.

순례길 코스인 안성리로 들어서면 추사가 귀양살이를 했던 적거지(사적 487)와 그의 업적을 볼 수 있는 ‘제주 추사관’을 만날 수 있다.

안성리에는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 당시 대정읍에서 출정, 민중 봉기를 일으킨 선봉장인 이재수·강우백·오대현을 기리는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다.

신축교안은 봉세관(捧稅官)과 천주교 세력의 횡포에 대항해 일어난 민란으로 많은 천주교인 등 인명이 희생당했다.

제주교구는 2003년 ‘미래 선언’을 채택, 신축교안에 대해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갈 것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순례길 코스에는 ‘삼의사비’도 포함돼 있다.

순례길의 종착지는 모슬포성당이다. 모슬포에는 1951년 아일랜드 출신 설리번 군종신부가 옛 육군 제1훈련소 훈련병 및 중공군 포로들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됐다.

모슬포성당은 1954년 준공 됐는데 중국군 포로들이 건축 공사에 참여했고,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통회(痛悔)의 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다음 달 중 정난주길을 ‘빛의 길’이라 명명하고 개장식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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