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선열의 숭고한 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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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제주일보 70년 ‘제주의 애국선열을 만난다(上)']

올해로 광복70년을 맞아 제주를 비롯한 국내에서 민족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 국민이 하나 되어 선진한국, 통일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들이 전개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본지는 ‘대한민국 광복 70주년, 제주일보 창간 70주년’을 맞아 잊혀져가는 제주출신 애국선열 가운데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을 추서 받은 22명(가나다 순)의 행적을 2회에 걸쳐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강기찬 지사(1903년~1955년)···야학 개설 등 항일운동 앞장

 

제주시 건입동 출신인 강기찬 지사는 1929년 각 동과 리에 야학을 개설해 항일민족의식과 무정부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서다가 1930년 7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때문에 같은 해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했으나 1931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강수오 지사(1882년~1918년)···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참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출신인 강수오 지사는 1918년 10월 5일 중문면 지경에 있는 법정사에서 주지 스님 김연일과 선도교 신도 박명수 등과 함께 중문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해 감금당하고 있던 동지 13명을 석방시켰다.
이어 여세를 몰아 서귀포경찰관주재소를 점거하기 위해 진격하던 강 지사는 서호리 근처에서 동지 66명과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으로 같은 해 12월 27일 옥중 사망했다.

 

▲강창규 지사(1872년~?)··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참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출신인 강창규 지사는 1918년 10월 중문면 도순리 법정사 주지 스님 김연일을 중심으로 신도 및 농민들과 함께 일본인 관리 축출과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했다.
이에 강 지사는 1919년 2월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4년의 도피 끝에 1922년 12월 28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8년의 옥고를 치렀다.

 

▲강창보 지사(1902년~1945년)··제주 야체이카 운동 전개

 

강창보 지사는 제주도에서 청년동맹과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해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농민과 해녀들의 권익 보호와 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자 탈출해 일본대판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강 지사는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해 시국문제를 연구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1943년 4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1945년 1월 옥고 중에 옥사했다.

 

▲강춘근 지사(1892년~1919년)···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참가

강춘근 지사는 1918년 10월 제주도 남제주군 좌면 법정사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서 시위군을 이끌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3명을 붙잡고, 무고하게 감금돼 있던 13명의 구금자를 풀어줬다.
하지만 강 지사는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1919년 1월 6일 재판을 기다리던 중 순국했다.

 

▲고병희 지사(1900년~1964년)···야학운동 통해 민족의식 고취

고병희 지사는 1922년 일본 동경의 정칙영어학교에 재학 중 재일한국인 유학생의 비밀결사인형설회(螢雪會) 및 흑도회, 흑우회에 가입·활동, 사회과학 이론의 연구를 통해 항일사상을 고취시킨 데 이어 1927년 4월 제주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의 연구를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서회 조직했다.
이후 고 지사는 1927년 10월 소비조합을 결성해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1929년 9월 각 마을에 야학을 개설해 항일 민족의식과 무정부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1931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고사훈 지사(1871년∼1909년)···일제 항거해 의병운동 펼쳐

고사훈 지사는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자 1908년 김석윤·과 함께 장성 출신 의병장 기우만·기삼연 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주 및 광양에서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한 무기를 비밀히 제조해 공급했다.
이후 고 지사는 1909년 2월 10일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르게 되자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대정에서 창의 격문을 살포했다가 삼일 뒤 서광리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피살됐다.

 

▲김두삼 지사(1893년~1919년)···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참가

김두삼 지사는 1918년 10월 5일 일어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 참가해 일본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하고 중문주재소를 습격, 감금됐던 도민 13명을 풀어준 데 이어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 지사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인해 같은해 8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만석 지사(1884년~1902년)···제주의병항쟁 참가

김만석 지사는 1902년 2월 25일 제주 광양동에서 고승천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뒤 대정군 영낙리와 신평리, 광청리, 안성리 등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했다.
이어 김 지사는 같은 해 3월 1일 동광청리 민가에서 고승천과 함께 대정주재소 소속 일본 경찰관에게 붙잡혔다가 사흘 뒤 주재소에서 간수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다가 대정 동문 밖에서 피살, 순국했다.

 

▲김봉화 지사(1882년~1919년)···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참가

김봉화 지사는 1918년 10월 5일 일어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 참가해 각 면의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도민들의 동참을 권유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억울하게 잡혀 있던 도민 13명을 풀어줬다.
이후 김 지사는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 만에 붙잡혔고,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해 같은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성종 지사(1915년~1945년)···日 오사카서 애국계몽운동 전개

김성종 지사는 1938년 1월경부터 일본 오사카에 있던 한인 야학교인 성심야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한국어의 유지, 한국 예찬 등의 민족의식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결국 김 지사는 1942년 11월 14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데 이어 이듬해 11월 26일 오사카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4월 6일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열흘 만에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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