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제주서 예술로 사람들에게 위안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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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토평에 둥지 '빛의 조각가' 박충흠..."제주는 보물섬"
   

‘미답(未踏·아직 아무도 밟지 않음)의 길에서 나를 만나게 하고, 미지의 공간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굽이굽이 흐르는 산등성이에 기대어 꽃잎 모양의 천창(天窓) 아래 서면 몸으로 파고드는 빛은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2011년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에 설치된 조각 작품 ‘산-하늘문’에 대한 한 평론의 일부다.

 

이 작품을 제작한 이는 ‘빛의 작가’ 박충흠(70)이다. 제주 이주민인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4살이던 6·25전쟁 1·4후퇴 때 서울로 피난 온 후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동덕여대와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지내다 55살이던 2000년 홀연 강단을 떠났다. 오로지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창작에만 매진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박충흠은 제주에서의 삶을 동경했었다. 1967년 수학여행 때 제주를 처음 다녀간 후 1976년 신혼여행 차 다시 제주를 찾고 난 이후에는 그도, 아내도 ‘제주앓이’에 시달렸다.

 

마침내 박충흠은 1998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에 있는 주택을 매입해 작업실로 쓰며 서울을 오가다 2000년 서귀포시 토평동 언덕의 땅을 사들여 집과 작업장을 짓고 2006년 정착했다. 문섬과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이곳에는 현재 카페와 펜션,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의 이름은 ‘제주의 봄’. 영어로 치면 ‘Spring’, ‘Seeing’, ‘Meeting’ 등 중의를 띤 말이다.

 

최근 그곳에서 만난 박충흠은 ‘산-하늘문’ 작품을 언급한 후 “한라산이 바로 이 작품의 모티브”라며 “겨울에 하얗게 눈 덮인 한라산은 설문대할망이 머리를 풀고 누운 모습이다. 신령스런 영산(靈山)의 기운을 작품에 반영한 것”이라며 제주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수많은 금속판을 이어 붙여 다양한 형상을 조형하되 이들 철판 사이에는 어김없이 틈이 있다. 여기에다 인공조명이 설치돼 불을 밝히고 야외의 경우 햇빛이나 달빛, 별빛이 비추면서 그림자가 주변에 투영될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빛은 곧 생명입니다. 암흑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죠. 빛이 작품의 수많은 틈새를 지나며 창출하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무늬의 공간은 보는 이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사람들이 모처럼 영혼의 휴식을 취하며 내면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연의 순환 질서를 상징하는 조형언어를 통해 사색과 명상의 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박충흠은 “친구나 지인들에게서 ‘조각가’를 센소리로 발음한 ‘쪼각가’로 불린다”며 “셀 수 없이 많은 철판을 녹이고 붙이는 등 작업이 고된 노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그의 작품은 제네바 유엔 대표부 공관, 서울추모공원 등에 세워져 있고, 작가의 동의 없이 색채를 바꾼 사실이 최근 드러나 논란에 휩싸인 독립기념관 ‘3·1정신상’도 그로부터 탄생했다.

 

박충흠은 상당수의 작품 제목을 ‘무제’로 놔두었다. 관객들의 감상의 폭과 범위를 미리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다.

 

“빛과 쇳조각 구조물이 하모니를 이뤄 빚어낸 공간 속으로 관람객이 들어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느끼고 경험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됩니다. 관람객이 스스로 얻는 울림이야말로 깊고 짜릿할 겁니다. 미리 작가가 선을 그어놓고 강요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느덧 대화의 주제는 제주로 바뀌었다. 박충흠은 “제주는 돌멩이, 공기, 바람, 바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보물섬”이라며 “원형이 고이 보존되길 바란다”고 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묻어났다. “최근 4~5년 새 곳곳에 길이 뚫리고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어요. 멀리 내다보고 후세의 앞날을 고민하며 제주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미 조각가로서 남부럽지 않은 명성을 떨쳐온 그, 이제 제주의 보물들이 주는 영감을 듬뿍 받으며 더욱 깊은 예술적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예술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아름다운 제주를 무대로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쪼각가’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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