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이종현(재즈 그룹 ‘메인스트리트’의 멤버)은 시끄럽고 복잡한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접고 푸른 바다를 정원으로 한 작업공간에서 오직 음악만으로 도민과 소통하기 위해 제주에 정착했다.

10년 후에 울리도록 알림 메시지를 맞춰 놨다. 내용은 ‘인생의 제2막 다시 쓰기’. 일상에 치이며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남자는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을 훌쩍 흘려보냈다. 어느 날 그도 잊고 있던 낯선 문자음이 울리고 그 작은 소리는 제주 섬과 그를 잇는 인연의 시작이 됐다.


비취빛을 띤 잔잔한 파도가 예쁜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안도로. 그 곳의 바다가 ‘벨롱벨롱(반짝반짝의 제주어)’ 빛난다. 바로 이종현(40·기타리스트)·정회석씨(38·프로듀서)의 낮으면서도 리듬감 있는 기타와 판데이로(pandeiro, 브라질 북부 사람이 흔히 쓰는 악기의 일종으로 방울 또는 금속 향판(響板)이 달려 있는 작은 북) 연주가 더해져서다.


이들은 군대에서 선·후임이었지만 ‘음악’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한 열정 덕에 연(緣)을 지속, 2014년 이곳 제주까지 함께 왔다.


기타리스트인 이씨는 수많은 가수들과 숱하게 음악 작업을 해 온 재즈 그룹 ‘메인스트리트’의 멤버이다. 정씨는 잘 다니던 외국계열사인 IT회사를 과감히 정리하고 큐그레이더(Q-grader) 자격증을 취득,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다 그동안 찬찬히 설계해온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섬’을 선택했다.


농담처럼 노래 부르던 이들의 공통된 꿈은 단 하나였다. 바다를 안은 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만들며 사는 것, 그게 전부였다.


“몇 해 전 여행에서 만난 제주의 모습은 우리의 꿈을 담기에 충분한 그릇같은 곳이었다”는 이들은 “창을 활짝 열어 놓으면 느껴지는 제주의 향기는 맘속에 내재돼 있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늘 간질여준다”며 제주정착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종현과 정회석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안도로 한켠에 복합문화공간 카페 ‘벨롱’을 문 열고 매주 다양한 공연으로 제주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커피 감별과 한 번 먹으면 자꾸 생각나게 하는 ‘마약 샌드위치’ 만들기에 뛰어난 정씨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이들은 세화리 해안도로 한켠에 복합문화공간 카페 ‘벨롱’을 문 열었고, 매주 다양한 공연으로 제주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바다를 눈앞에 둔 공연장에서 유명 여부를 떠나 단지 악보와 악기를 통해 관객과 교류할 수 있는 것도 제주만의 매력이다”고 한목소리를 낸 이들은 “그래서 많은 가수·밴드들이 흔쾌히 섭외에 응해주고 있는 것 같다”며 제주의 장점을 늘어놨다.


과감한 도전에도 서슴지 않는 이들이다. 제2의 인생을 펼칠 곳, 꿈꾸는 미래를 완성할 장소로 제주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쿠스틱(acoustic, 록이나 팝의 용어로는 앰프를 사용하지 않고 생음악으로 들려주는 악기나 연주를 가리킴) 밴드 ‘비아젬(viagem)’을 결성해 작사·작곡에서부터 녹음 작업까지 손수 진행하면서 미니앨범을 완성했고, 간간히 공연도 열고 있다. 내년 즈음엔 정식 앨범도 발매해 자신 있게 팬들과도 만날 예정이라고 귀띔한다.


제주생활 1년차인 이들에게 몸소 느껴지는 제주의 두드러진 변화도 있다고 한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 또는 내려와서도 섬사람, 특히 제주인들은 무뚝하고 인심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이들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타적이기보다는 포용하려는 모습, 그리고 먼저 다가와 호의를 베풀어주는 지역주민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곳보다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사람들이다”며 편견(?)에 대해 반박했다.


이에 덧붙여 제주에 정착해 있는 많은 문화예술인들로 인해 우려되는 점도 있다는 이들이다.


“제주의 여유로움, 낭만, 아름다움을 따라 정착한 예술인들이야 어떻게 보면 단지 삶의 공간만 바뀌었을 뿐이다”고 입을 뗀 이들은 “새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로 인해 신축 건물이 늘고 자연스럽게 땅값이 올라 어떻게 보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훗날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제주사람에게서 ‘고향’을 빼앗게 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다”고 걱정스러워하기도 했다.


느림의 미학을 알고 있기에 번잡한 곳을 뒤로하고 제주를 선택한 이들, 단지 바다 안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완성하고 싶다는 기타리스트 이종현, 샌드위치 만드는 일만큼이나 사랑하는 음악을 택한 큐레이더 정회석, 이주민 모임보다 지역 청년회 활동에 더 적극적인 이들이 그리는 미래에서 제주의 바다 빛깔이 더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