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제주 특산품 판매 중국 대륙 전역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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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소주.삼다수 등 판매 주력...재중국 제주도민회 살림꾼 자처
   
고창준 사장(사진 아래 오른쪽 두번째)이 중국 상하이 카르마 유한공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중국 대륙에 고향 제주의 특산품을 가장 많이 판매하는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고창준 상하이 카르마유한공사 사장(48).


무역회사인 상하이 카르마, 물류회사인 상하이 코로스 로지스틱스, 유통회사인 이우 카르마 등 3개의 무역·물류·유통법인을 운영하며 제주 상품은 물론 한국의 특산품들을 판매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를 상하이 현지에서 만났다.


그는 “중국에서 팔리는 제주 상품은 ‘제주’라는 글자가 항상 앞에 들어간다. ‘제주에서 수입한 한국 제품’이라는 것”이라며 제주 상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거듭 강조했다.

 

▲중국 첫 도전기=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인 그가 중국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제주대를 졸업하고, ROTC 해병대 장교로 제대한 이후다.


1992년 2월 제대 후 자동차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어느 날 한국과 중국의 수교 체결 소식을 듣게 됐고, 정부의 북방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중국은 정말 생소한 나라였지만 이상하게도 중국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곧바로 중국 어학연수를 준비했고, 6개월을 준비한 끝에 1993년 4월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에서 중국어 연수를 시작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이자 산악인이기도 한 그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연수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중국어를 빨리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은 물론 해외 자체를 몰랐었다”며 “당시에 왜 중국에 가려고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그는 1년 6개월 동안의 중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곧바로 필리핀으로 옮겨 8개월가량 영어를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또 다시 중국으로=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무역회사와 여행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다. 하지만 그는 늘 중국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친구의 소개로 서울에 소재한 복합물류회사에서 포워딩(Fording)업무를 맡게 됐다. 포워딩은 국제 무역거래에서 화물을 최적의 경로와 수단을 통해 운송하는 전문 분야다.


그는 당시 물류는 물론 무역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며 매일 고시원에서 국제 물류와 무역을 공부했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97년 말 중국 톈진 현지법인 주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현지법인은 적자 상태였고, 중국의 물류와 무역을 또 다시 새롭게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을 해낸다. 현지법인을 총괄하며 적자를 보던 회사를 순이익 60만달러 회사로 탈바꿈시켜다.


그는 유럽과 중남미, 중앙아시아, 중동 등을 가리지 않았고 전 세계로 화물을 운송했다. 한 달에 20피트 컨테이너 1000개를 처리하기도 했다. 컨테이너가 6m 정도임을 감한할 때 길게 이으면 6㎞에 달하는 물량이다.

그는 “어느 날 사장이 부르더니 ‘중국 법인을 정리하라고 보냈더니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며 “당시 주변에서는 기적이라고 했고, 고생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중국 톈진에서 자리 잡았던 그는 2004년 불모지인 상하이로 옮기게 된다. 상하이에서 신설 법인을 만들고 직원을 뽑아 또 다시 새롭게 업무를 시작했다. 법인을 세우고 난 후 처음 3개월 동안 아무런 실적도 내지 못하는 힘겨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 굴지의 타이어회사와의 계약을 시작으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까지 140개 업체와 거래를 이어가며 다시금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고창준 사장의 사무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중국 수입 판매 상품들

▲제주 상품을 팔아라=10년 넘게 주재원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성과를 냈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다. 그는 “고객이 원하면 어디든 갔고, 일주일에 여덟, 아홉 번은 술을 마신 것 같다”며 “내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산 것 같았고, 그만큼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2007년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상하이에 설립한 물류법인을 인수해 독립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 회사가 바로 국제 물류법인인 상하이 코로스 로지스틱스다.


막상 독립을 하니 회사에 소속돼 있는 것과는 달리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없었다.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지만 늘 그래왔듯 곧바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는 상하이와 이우에 무역·유통회사를 설립, 유통분야로 발을 넓혔고 특히 제주 상품 판매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8년부터 제주 삼다수를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삼다수는 그에게 가장 힘든 숙제가 돼 버린 것도 사실이다.


2010년부터는 제주를 대표하는 ‘한라산소주’를 독점 판매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술장사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반대했지만 고향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손을 댔다.


한라산소주의 중국 진출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그 중심에는 그의 노력과 한라산소주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처음에는 상하이에서 한라산소주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판로를 뚫는 것도 그만큼 어려웠다. 그는 “식당에 한라산소주를 무작정 맡기고 며칠 후에 가서 찾으면 직원들이 ‘그게 뭐냐’고 되묻곤 했다”며 “식당 냉장고 구석에도 들어가지 못해 창고에 박혀 있는 한라산소주를 꺼내오면 마시고 돌아오곤 했다”고 말했다.


그의 차에는 항상 한라산소주가 실려 있었다. 저녁마다 연락이 오면 직접 식당으로 실어 나으며 발품을 팔았다.


그러던 중 2011년부터 교민들의 참가하는 축구대회를 한라산소주가 공식 후원하면서 한라산소주는 급속도로 교민사회를 파고들었다. 올해도 지난달 상하이 동방녹주 경기장에서 ‘제6회 한라산소주배 동방FC 초정 축구대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중국 내 한라산소주 판매량은 지난해 54만병을 넘었고 올해 1분에만 31만2000병이 수출됐다. 올해는 120만병 돌파가 예상된다.


그는 “상하이를 선점한 이후 중국 전역으로 뻗어가고 있다”며 “북경과 심양, 대련, 청도, 우루무치는 물론 내몽고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 상품은 물론 완도 김과 가평 막걸리, 전라도 젤리음료, 뽕입차 등 국내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제품들을 총판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20일 칭다오에 상하이 카르마 분공사를 공식 등록했다. 또한 베이징과 광저우 등으로 판매망을 확대하는 등 중국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나가고 있다.


아울러 한국에서 수입되는 식자재를 판매하는 토털 매장 설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는 제주 상품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제주는 최고의 브랜드이기 때문에 이름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마케팅이 된다”며 “제주 상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아쉬운 부분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품질은 물론 디자인과 가격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수출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며 “해외에서 물건을 팔려면 해외에서 마케팅을 해야 하고, 효과적인 판촉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교민사회의 살림꾼=그의 사업 신조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와 사람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휴대전화를 놓지 않는다. ‘하루에 세 사

람 이상 만나고, 퇴근 10분전에 전화하자,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자’라는 생활 습관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도 2004년 주재원 당시 상하이 현지 법인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의 사업 파트너인 중국인 왕청씨와는 20년에 가까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또 중국 제주도민회의 살림꾼이자 교민회의 마당발이다. 2004년 처음 제주도민회가 만들어 질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선배들을 대신해 총무를 맡았고 이후 총무와 사무국장, 부회장 등을 번갈아 맡으면 중국 제주도민회의 산파와 살림꾼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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