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학자 꿈 포기, 세계 넘나드는 사업가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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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사맨의 정신 살려
   
정성태 상하이 지아티에 대표(사진 왼쪽에서 세번째)가 임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정성태 대표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이다.

왜소한 체격에도 중학생 때 학교까지 뛰면서 등교할 만큼 탄탄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주변에서 당찬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만큼 자존심도 셌다.

그런 그도 자존심이 상했던 일이 있었다.

초.중학교 때에는 늘 상위 성적을 유지했지만 제주제일고에 입학한 후 성적이 떨어진 것.

제주시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그는 3년 동안 책에 파묻히기로 결심했다.

결국 재수 끝에 서울대 불문학에 들어갔다.

그의 꿈은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꿈을 앗아간 것은 가난이었다.

1남5녀의 장남인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81년.

눈앞이 깜깜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독재시대에 맞선 운동권에 몸을 담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재산이라곤 조그마한 감귤 과수원 하나뿐.

그래도 다행인 것은 4년 내내 학점이 좋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학자의 꿈을 포기하고 법조인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언제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했다.

결국 그는 현실에 몸을 담았다.

직장을 찾기로 한 것이다.

대학 불문학과 선배의 권유에 의해 8개월간 새한미디어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당시 CD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테이프 생산을 했던 회사의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해 그만뒀다.

그는 대우그룹이 개인의 역량 발휘를 존중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대우행을 결심했다.

그는 실제 대우는 담당자가 많은 것을 결재할 만큼 개인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가졌다고 강조했다.

1989년 1월 1일 (주)대우에 입사했다.

(주)대우의 핵심 사업은 국내에서의 철강 수출입 업무.

그는 물을 만난 고기였다.

(주)대우의 주력 상품이 철강인 만큼 경쟁국인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내공을 쌓았다.

실제 그는 1989년 포항제철과 동부철강, 연합철강, 현대제철, 강원산업이 만든 철강을 이탈리아와 독일에 수출하며 한국산 철강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가 하면 수출전선에서 외화를 벌어오는 데에도 한몫을 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능하다.

이는 그가 철강과 무관해 보이는 인문학에 관심이 크고 깊게 공부하고 있기 때문.

그는 1997년 1월 중국지사로 발령받은 것을 스스로 만족해했다.

이에 앞서 그는 1993년 1년 동안 북경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이로 인해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그는 영어, 중국어, 불어에 능하다.

평소에도 중국의 역사, 문화, 소설에 관심이 컸고 한자와 한문을 즐기고 있었다.

중국 철강 시장을 즐긴 덕분일까.

그가 중국 지사에 온 지 1년 만에 매출액이 2배로 불어났다.

또한 그는(주)대우의 매출액이 1989년 2억불에서 1995년 100억불에 달했다고 언급했다.

잘 나가던 정 대표가 있던 (주)대우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1997년 말 닥친 외환위기 때문이다.

철강 가격이 3분의 1로 떨어졌다.

그러나 2000년께 세계 경기도 살아나면서 (주)대우(2000년 12월 대우인터내셔널로 명침 바뀜)도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외환위기가 찾아오기 바로 직전인 1997년 그는 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북한과의 접촉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상하이에 내린 북한의 고려항공기를 통해 김우중 회장 일행이 북한을 왕래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그는 (주)대우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술과 담배, 생필품을 최고급으로 최대한 많이 구입해 고려항공기에 건넸다고 한다.

이처럼 회사 측의 신뢰가 높았던 그의 업무는 철강 수출‧입뿐만이 아니었다.

 

(주)대우 본부장과 부사장의 비서 업무를 맡을 만큼 다방면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입사 후 2년 동안 집에 가지 못할 정도로 업무에 목을 맸다.

그 2년 동안 주말 한 번 쉬지 못했는데 이는 (주)대우의 기록일 것으로 정 대표는 기억했다.

그는 자신이 입지를 세울 때까지 바쁠 것이니 이를 이해해달라고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출신 부인에게 언급했다.

나중에 모든 능력을 가정에 쏟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지금까지 이를 지키지 못 하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당시 수출입 업무에 매진했던 해외 상사원이라는 위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당시 해외 상사원에게는 최고급 아파트와 승용차가 제공됐고, 교육비와 의료비도 지원됐다고 한다.

외화를 벌어오는 것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시선도 있어서 자부심도 컸다.

은행은 물론, 세관에서도 대우를 해줬다.

회사도 접대와 관련된 술값 영수증을 따지지 않을 정도였다.

월급도 일반 직원보다 2~3배가 많아 3~4년 근무한 후 국내에 오면 아파트 1채를 살 수 있었다고.

 

 

그런 그도 2002년 말 가족처럼 사랑했던 대우인터내셔널을 떠나야 했다.

해외 상사원의 화려함 뒤에 있는 어둠 때문.

보통 해외 상사원의 경우 해외에서 4년 생활하면 국내로 들어와 4년 일하다가 또 4년 해외에서 생활하는 게 관례였다.

이에 따라 자녀의 교육과정이 4년 마다 바뀌는 통에 정체성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일관성 있게 자녀 교육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조직을 떠나 개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라고 판단했다.

물론 외환위기 과정에서 발생한 대우그룹의 몰락도 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세계를 경영한다는 대우 그룹의 몰락 원인은 무엇일까.

정치적 해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부실 경영에 따른 자금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는 “(주)대우의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룹 전체적으로는 자금난이 빚어진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정치력이 부족했고, 자금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에 그룹 내 회장단을 비롯해 김우중 회장도 회사가 무너진 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 김우중 회장은 지난해 8월 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를 통해 경제 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대우에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면서 대우를 ‘부실 기업’으로 몰고 갔다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과 강봉균 재경부 장관은 자금난을 겪는 대우가 재벌 구조조정 개혁안이란 것을 합의해서 발표한 후에도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02년 12월 대우인터내셔널을 나온 정 대표는 철강 제품을 수출‧입하는 자기만의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 2년 동안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신뢰 문제 때문에 대우인터내셔널의 파트너와 연결하지 않고 국내의 중견기업의 상품을 중국에 팔고, 중국의 제품을 한국에 파는 일을 했다.

이 때문에 매출액이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2005년 그는 큰 맘 먹고 대우인터내셔널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다. 협상이 이뤄졌다.

그에게 돈 벌 수 있는 큰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정 대표는 대우인터내셔널과 함께 중국산 강철 제품을 대거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팔면서 이득을 취했다.

1건당 수천만달러에 달하는 대형 계약이었다.

사우디아라비와는 연 12만톤에 이르는 상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의 조선업이 한창 활황에 이를 때여서 철강 경기는 고공행진을 달렸다.

한국의 조선업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철강이 부족했다.

그는 중국의 내로라하는 업체들로부터 철강을 구입해 한국 조선업체에 공급했다.

당시 공급량이 3~5만톤에 달했으며, 연 매출액이 1억불을 넘었다.

회사 설립 때 직원이 4명이었으나 사업이 상승세에 타면서 최대 70명에 달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정 대표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모두 날렸다.

2009년 1년은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몰두했다.

2010년 조직정비와 인력 구조조정에 나선 그는 사업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철강 제품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기로 한 것.

사업을 하려면 조직과 자본이 충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어서 특화 상품을 거래하기로 했다.

그는 고품질의 한국 중소기업의 특수강 중간제품을 중국 시장에 팔면서 시장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산 스테인리스를 한국에 파는가하면 중국산 합금강을 미국에 팔고 있고, 사업 대상지를 미얀마와 동남아, 중동지역까지 넓혔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을 제자리에 올려놓은 그만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이든 어디에서든 팔 수 있는 상사맨의 정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절망하지 않고 무조건 팔아야 하는 게 상사맨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게으르면 죽는다’는 말도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이 말은 정 대표의 어머니가 언급한 얘기다.

그의 어머니는 예전에 ‘유월 소는 게으르면 죽는다’고 얘기했다.

농사일이 한창 바쁜 6월에 소가 게으르면, 그 소는 도축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소띠인 정 대표가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상하이지회의 수석총무로 3년째 일하고 있는 그는 전 세계의 대우맨들과 네트워크를 통해 수시로 세계 경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네트워크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고향 표선면 가시리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했다.

그는 현재 가시리로 주소지를 옮긴 상태.

그는 표선면에서 생산된 모든 수산물을 한 데 모아 국내.외에 판매하는 일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제주에 애정도 표현했다.

그는 제주의 개발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결정한 것이 최상인 것 같아도, 후일에 보면 최상이 아닌 것이 세상에는 수두룩하다는 것.

때문에 미래에 개발할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제주인들은 제주 섬의 가치를 스스로 높여야 한다고 그는 언급했다.

이는 북한이 개방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원시미를 잃은 제주를 기피하고 원시미가 살아있는 북한을 찾는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관광객이 찾지 않는 제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섬이 없는 만큼 섬을 특화로 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또 중국 자본의 제주 투자와 관련해 “화교 자본은 유대 자본과 함께 배타성이 강한 만큼 투자 계약을 할 때부터 꼼꼼히 따져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불화를 미리 예방해야 하며 건강한 중국자본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졸업 후 철강 제품 수출.입에 인생을 건 남자.

키 162cm, 몸무게 53kg인 그에게 철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갈까.

그는 철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생활의 근간이라고 했다.

또한 청춘을 가져가버린 존재이기에 얄밉다고도 했다.

그의 상하이 사무실에는 ‘일범풍순(一帆風順)’이라는 글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그의 사업이 순풍에 돛단 듯 순항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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