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특허 기술로 승부...일본서 기업가 꿈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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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열정, 품질 경영 시스템으로 성장...고향 제주에 올리브 재배 등 조언
   
▲ 강민식 (주)미츠마루 사장이 공장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공학도의 꿈을 키우다=해방 이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강민식 ㈜미츠마루 사장은 고무공장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하면서 공학도의 꿈을 키웠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출신의 아버지는 15살때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정착한 후 다른 재일제주인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생활을 했다. 서귀포시 법환리 출신인 어머니와 결혼한 후 고무공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애썼다.

아버지는 강 사장을 민족학교인 건국학교에 보내 체계적인 인재 양성 교육을 받게 했다. 건국학교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 일본에 남게 된 재일동포들이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힘을 모아 설립한 학교로, 창립자인 조규훈 초대 이사장은 제주시 신촌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강 사장은 건국고등학교에서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의식을 갖춘 인재로 성장해 명문대학인 와세다대 이공학부 기계과에 들어가 공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비를 제외한 생활비를 직접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대학생활은 힘든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강 사장은 1학년 때부터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연구와 공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다.

대학 시절 몸에 밴 연구 방법과 기술들은 이후 회사를 창업하는데 훌륭한 자양분으로 작용해 새로운 도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밑거름이 됐다.

   
▲ 일본 내 중견 플라스틱 제품 생산 기업으로 성장한 미츠마루 공장 건물.
▲민족 차별을 이겨내다=대학 졸업 후 취업에 부풀었던 강 사장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벽은 냉담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민족 차별로 괜찮은 일자리는 취직할 수 없었던 시대였고, 기계 설계 도면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불가능한 사실을 깨닫자 강 사장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연구에 매달렸던 강 사장의 열정과 능력을 지켜본 담임교수가 대기업에 있는 제자에게 추천을 해주면서 대기업 계열의 삼국공업에 취업하는 기회를 잡게 됐다. 삼국공업은 현재 상장기업인 미꾸니공업으로, 당시 공학 계열에서는 외국인이 취업할 수 없는 상위 클래스의 회사였다.

강 사장은 도쿄에 있는 본사 기술부로 발령을 받아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을 이겨내야만 했다. 특히 미쓰비시 등 내로라 하는 업체 연구진과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상황 등을 감안해 회사에서는 귀화할 것을 권유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갖가지 역경을 이겨낸 강 사장은 간부 후보생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오사카에 있는 아버지가 일본여자와 결혼할 것을 걱정해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여러차례 독촉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마감해 오사카로 돌아온 강 사장은 그동안 쌓아온 연구기술과 직장생활 경험 등을 살려 기업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 미츠마루의 주력 제품인 수지 식탁보. 미츠마루는 식탁보, 인조잔디, 발코니 매트 등 다양한 주택용 제품을 비롯해 재활 건강기구까지 생사 라인을 다양화하고 있다.
▲기업가로서의 길을 걷다=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둔 강 사장은 ‘플라스틱’과 관련된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선배 회사에서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술 연구를 계속한 끝에 플라스틱 관련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러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회사 창업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대학 동창이자 일본 가나가와현의 재력가 집안 친구로부터 300만엔을 빌릴 수 있었고, 이에 1966년 5월 오사카시 히라노구에서 ‘미츠마루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기업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창업 후 플라스틱으로 만든 ‘수지 식탁보’가 주력 제품으로 생산됐고, 시장에서의 반응도 좋았다. 수지 식탁보는 1년 간에 걸쳐 거듭된 제조와 문제점 검사 및 보완 과정을 거쳐 생산된 제품으로, 가격과 품질 면에서 뛰어나 꾸준하게 시장에서 판매되면서 회사도 착실하게 성장해갔다.

거듭되는 성장세에 힘입어 7년 만에 창업 당시 차입금 300만엔을 상환하게 된 강 사장은 1972년 수지 식탁보에 이어 ‘조인트식 인조잔디’를 개발하면서 회사를 키워나갔다.

조인트식 인조잔디는 일본에서 인정받는 건축 관련회사인 세키스이하우스㈜와 헤베르하우스㈜ 등에 잇따라 납품되면서 품질을 인정받았고, 이에 힘입어 1976년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부지 면적 1200㎡의 본사 공장도 준공됐다.

▲품질과 신뢰로 회사를 키우다=수지 식탁보와 인조잔디를 비롯한 미츠마루의 제품들은 7개의 특허기술로 만들어진 고품질 제품이라는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강 사장은 1991년 수지 식탁보의 제조 거점을 한국으로 이전, 합작회사인 ‘삼조합성수지’를 설립하고 경기도 안산시에 부지 면적 3300㎡의 공장을 설립했다.

안산시 공장은 최근에 문을 닫았지만 일본에서 배운 기술로 고국에서 제품을 생산할 당시 강 사장은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느꼈다.

고품질 경영에 주력해오던 강 사장은 1995년 회사 이름을 ‘㈜미츠마루’로 변경하고, 부지 면적 1500㎡의 히가시오사카공장도 준공하는 등 사세를 확장시켰다. 이어 공장 시설에 대한 국제품질규격 ISO9001을 획득하면서 발코니 매트와 방수판, 내장재, 식탁보 등 주택 및 인테리어 상품 등에 대한 품질 경영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재활 건강기구 개발에 착수하면서 의료기기 제조허가도 취득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미츠마루는 협력기업을 포함해 연 10억엔의 매출액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 당시 3700만엔과 비교할 때 품질과 신뢰가 일궈낸 값진 성과다.

강 사장은 “고객이 만족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모토로 철저한 품질 관리로 신뢰를 쌓아온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웃음지었다.

▲고향 제주를 말하다=자원 절약과 친환경 제품 생산 및 사회 공헌을 회사 목표로 내건 강 사장은 고향 제주에 대해서도 환경을 지키면서 차별화된 특산물을 만들 것을 조언했다.

강 사장은 “화산섬 제주의 기후 여건상 올리브 재배지로 적지”라며 “감귤만 하지 말고 올리브를 재배해 기름을 생산하고 올리브 잎으로 축산 및 양식광어 사료 등으로 쓰면 좋은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 제주와 환경이 비슷한 나가사키에서 운영 중인 수경재배시설(식물공장)을 언급하며 제주에도 도입하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가족사 문제로 제주를 찾는 게 쉽지 않아 1991년 안산에 공장 설립을 추진할 당시 제주를 처음 방문했다는 강 사장은 “부모님의 고향이기 때문에 제주를 돕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다”며 앞으로 제주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만들어 나가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강 사장은 “일본은 사람을 키워 발전을 이루는데 한국은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것 같다”며 “제주의 청정 환경을 살려 나가면서 제주에서 많은 인재가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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