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기획]“인문학과 과학, 간급 좁혀 상생 도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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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자연과학
우리는 보통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마치 별개의 학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방법, 대상, 그리고 목표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구분되는 학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연과학은 법칙 정립적인 방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연 세계의 사실이 그 대상이 되며, 그 속에서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반면 역사학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개성 기술적인 방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보편적인 법칙의 발견이 아니라 반복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을 기술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자연과학적인 설명을 자연법칙, 이론, 가설을 통해서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인과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연법칙은 자연에 내재해 있는 자연의 보편적 규칙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동원한 자연과학적 설명은 매우 객관적이며, 그 자체로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인문학은 개별적인 사건이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처럼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완전히 다른 학문분야이고, 그 다름이 과연 얼마만큼 본질적인 것일까? 그리고 본래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처음부터 분열되어 있었던 것일까?

과연 언제부터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갈라지기 시작했을까?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구별화된 이해는 근대과학을 형성한 이른바 과학혁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6~17세기의 과학혁명은 2천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을 무너뜨리고 새 과학을 등장시켰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중세의 우주관과 세계관은 과학혁명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새 과학에 자리를 내주었다.

서양 중세가 물려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지구를 중심으로 수정처럼 투명한 공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여기에 별들이 붙어 도는 유한하고 계층적인 우주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본 하늘은 이 우주관의 잘못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결국 뉴턴에 의해 종합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체계는 중세의 우주관뿐 아니라 그것과 연결된 사고체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당시의 문인들은 중세 사고체계의 정합성이 깨지자 크게 당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간극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과학혁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과학의 수학화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 이후 과학은 그 안의 신비적?철학적 요소를 제거하면서 수학화의 길로 나아갔다. 원래 과학은 그리스에서 철학과 함께 시작하여 분리되지 않은 채 발전해 왔었다. 과학과 철학은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나누어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 접어들어 완전한 결별을 고했다.

철학은 예술과 가까워졌고, 과학은 기술과 거리를 좁혀갔다.

심지어 과학과 철학은 대립적인 방향으로까지 흘러갔다.

문인들은 과학이 인문학적 상상력을 제거했다고 비난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 산업혁명의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다. 과학과 협조한 기술의 영향으로 새로운 기계가 등장했고, 이것은 인간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문인들은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은 기계화가 인간 고유의 가치를 훼손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19세기까지 적어도 산발적이었던 과학과 인문학의 갈등과 부조화는 현대사회에 와서 보다 커지고 본질적인 양상으로 변모해갔다.

그 동안 인문학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데 비해 과학은 지속적인 발전을 계속하며 변화했고, 따라서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져만 갔던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과학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리 인간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사회의 성격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다가서는 과학기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물질적 편익을 제공해줌으로써 인간 생활의 편리성을 증대시켜 주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연생태위기나 환경오염처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인 제공자라는 부정적 측면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다.

보통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얘기할 때, 어느 한 가지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고, 때문에 과학 만능주의로 귀결되거나 반 과학 기술주의로 흘러갈 위험성이 많다.

과학만능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전형으로 생각하고, 과학의 객관성이나 힘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편익에 초점을 모은다.

반대로 과학기술의 부정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가져온 폐해를 거론하며 과학기술이 갖는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거나 과학의 합리성 자체를 문제 삼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이 극단적으로 흘러갈 경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이나 충돌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다.

바로 여기에 이른바 ‘두 문화’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사튼(George Sarton)은 과학과 인문학은 본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학은 자연적인 것에 못지않게 인간적이며, 과학적 활동은 그 성과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깊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보여 주는 추상화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비합리적 요소로부터도 영향을 받기도 하다.

과학은 인간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인문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현재 과학이 극도로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문학자들은 과학에 관심이 없고, 과학이 인문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튼은 과학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무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과학은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지적 활동 그리고 사회의 모든 측면과 불가분의 상호작용을 벌이면서 발전해왔고, 따라서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과학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만일 ‘두 문화’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과학과 인문학이 상생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최근 과학기술이 인류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문화’의 간극 좁히기는 더더욱 절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점점 극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자신의 전공분야에서만 지적 능력을 기르고, 인문학이나 과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과학도를 양성하는 교육시스템은 시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최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그것의 대중화는 학문 바깥세계에서의 ‘두 문화’의 간극을 좁혀가고 있다.

그러나 학문 세계 내부에서는 아직도 문과와 이과의 구분과 같은 임의적인 구분을 유지하며 ‘두 문화’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과학과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접근과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 인류가 처한 여러 위기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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