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어서 천당 갈래 서귀포 갈래 물으면, 난 서귀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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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초반 외로워서 파리 마리에게도 위로 받아
넘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려는 노력 생활의 중도’

 

   

지겨운 일상을 잊게 하고 지친 심신을 잠시 쉬게 하던 ‘낭만의 섬’ 제주가 최근 들어 남은 인생을 풀어놓고 싶은 ‘안식의 땅’으로 사랑받고 있다.
‘문화 이주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제주에 둥지를 튼 문화예술인들이 늘어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2015년 새해 들어 시작된 기획 ‘문화DNA, 제주와樂’은 제주살이를 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과연 그들을 붙잡은 제주의 매력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제주의 진면목을 새롭게 찾아 그 가치를 더욱 크게 빛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편집자 주】

 

‘한국 원로 화가’ 이왈종 화백(69)은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존재다.
 
 
강산이 두 번도 넘게 바뀌는 세월인 25년을 제주땅에 살 부비면서 살았고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미술교육을 한 지도 이제 15년이니 제주에서 그를 마주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는 지금 태어난 경기도 보다, 제주살이를 하기 직전 서울살이를 하던 세월보다도 더 긴 시간을 제주에서 보내고 있다. 그래서 제주에서 ‘문화이주민’을 이야기할 때 이왈종 화백을 빼놓을 수 없다.



잘 나가던 추계예술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제주행을 감행한 25년 전. 제주는 이왈종 화백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 5년? 그동안만 밥 굶지 않고 그림만 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내려왔죠.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보니까 돈도 벌게 되고 이렇게 미술관도 짓게 됐죠.”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는 그는 인생을 통달한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사실 이 화백은 제주생활 초기에는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작업을 했는데 떠나온 서울생활과 두고온 가족들 생각에 참 많이 외로웠다. 그때는 파리 한 마리에게도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주로 떠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어요. 얽히고 설키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죠. 그런데 예술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적당히 하면 절대 승산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예술을 한다는 게 무리에요. 예술가에게도 노동이 경쟁력이고, 그 노동을 통해서 영혼의 음식, 예술이 탄생하는 거니까요.”
 
 
이 화백은 제주살이를 택했기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을 절제하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도 그의 발길을 제주도로 이끌었던 큰 이유 중 하나다.

 
그가 대학에 몸담고 있을 당시 한국화단에는 ‘수묵 바람’이 불었다. 그렇지만 그가 보는 제주는 항상 밝았다.

 
흑백으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푸른 나뭇잎과 형형색색의 꽃, 옥빛 바다.

 
그는 자신이 즐거워야 남도 즐거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림이 한층 밝아졌다고 했다.  자연도 사람과 평등한 존재라는 그의 기본 철학이 배어 그의 그림에는 물고기도, 새도 사람과 별다르지 않은 크기로 등장한다.

 
오방색의 아기자기한 화풍은 그렇게 제주에 정착하면서 탄생한 ‘영혼의 음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넘치는 것을 항상 주의했다. 조금 내려놓고 살아가기,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시리즈를 낳았다.

 
사실 그의 그림이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잘 들여다보면 슬프고도 절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화사하고 밝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탱크는 때로는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 전쟁과 다름없다는 이 화백의 은유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구성원들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화백은 이 사회가 부드럽게 가야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잘 살고 못 사는 사람들의 편차가 최소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1년 (재)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사재를 털어 개관한 미술관이며 그간 컬렉션한 작품 480여 점을 등록한 점이나 매년 유니세프기금을 선뜻 내놓는 것이 모두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그의 인생 철학의 실천이다.
 
 
그의 불우했던 성장 환경은 나눔을 실천할 수 있게 했고 앞으로도 손에서 붓을 놓기 전까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아들, 딸 장성할 때까지 교육시키고 내가 쉴 수 있는 집이 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이 화백은 재단에 작품 1000점 정도를 등록할 계획이다.  

 
또 제주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교육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예정이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이 고향이고, 죽어서 (옥황상제가) 천당 갈래, 서귀포 갈래 물으면 서귀포에 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왜 제주가 좋은가’를 더 이상 물을 이유가 없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서귀포 왈종’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숨 쉬는 것처럼 그냥, 자연스러움이었다.

 
다만, 무분별한 난개발에서부터 제주가 지켜질 때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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