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논술은 사회문제 해법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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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는 최고 주제...심층적 접근 필요
‘논술’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제기하고 수험생에게 그 문제의 대안 내지는 해결책을 요구하는 시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정보화’ 또는 ‘정보화 사회’만큼 다루기 좋은 주제는 없다.

왜냐 하면 ‘정보화 사회’라는 주제의 영역이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매우 복잡다단한 데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쯤이면 이미 그 문제는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새로운 문제가 다시 대두되는 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정보화’에 대한 주제는 심층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보화’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 사회는 변화의 조짐을 맞게 된다. 국제 질서를 가르는 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이분법이 먹히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그전까지는 대수롭지 않았던 가치들, 예컨대 반핵, 평화, 환경 등이 대중들에게 새로운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획기적인 변화의 일격을 가한 것이 아랍과 이스라엘의 중동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은 암암리에 CIA 등을 통해 시종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결과는 아랍의 패배였다. 하지만, 아랍이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랍 국가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의식을 갖게 된다. 다국적 석유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연명하던 이들은 처음으로 아랍의 깃발 아래 석유를 무기화하는 조치를 취한다.

아랍의 이런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그 파장은 예측을 불허했다. 영국의 몰락은 대표적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추락은 그만큼 상징적이었고, 또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서방세계는 1, 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전쟁으로 ‘간단하게’ 이 문제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게 쉽지 않게 됐다. 일단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제 사회의 한 축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서방 세계는 ‘변신’으로 문제 해결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 서방 세계는 마침 한창 성장 중에 있던 전자산업, 컴퓨터산업, 자동차산업과 같은 지식형 산업에 주목하게 된다.

선진국들은 이 산업들의 성장가능성을 높게 보고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산업사회를 미국의 존 네이스비트(John Naisbitt)는 ‘정보화 사회’라고 이름 붙였다.

‘정보화 사회’의 전도사인 앨빈 토플러는 자신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제3의 물결은 다양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근거로 하는 아주 새로운 생활양식을 가져온다.

또한 대다수 공장의 기존 생산라인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새로운 생산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중략) 과거의 기준에 도전하는 새로운 문명은 관료주의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역할을 극소화시키며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준자치적인 경제 체제를 형성케 한다.

이 문명은 정부를 보다 단순화시키고 효율화시킬 것이며, 오늘날 어떤 정부보다 더욱 민주적인 정부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해 아주 새로운, 그러면서도 아주 소망스러운 사회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이처럼 미래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정보화 사회’의 요체인 ‘정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자본’을 쥔 자가 권력을 쥐게 돼있다.

반면에 ‘정보화 사회’에는 ‘정보’를 쥔 자가 권력을 쥔다.

그런데 ‘자본’은 이윤은 창출할지언정 복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독점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보’는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이는 ‘무한공유’가 가능하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도 ‘무한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와 달리 부정적인 관점에서 ‘정보화 사회’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보화 사회’가 진보의 결과라기보다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진화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보화 사회’는 기술진보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이해나 요구를 무시하거나 이에 위배될 경우 자본이 이를 묵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더구나, 이때 ‘정보화‘는 자본이나 자본과 결탁한 권력이 대중들을 통제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미셸 푸코는 이런 상황을 ‘판옵티콘’에 빗대서 표현한 적이 있다. 판옵티곤(Panopticon)은 ‘모두 본다’는 뜻으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이다. 이 감옥은, 간수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죄수는 자신의 행동을 간수가 늘 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정보화’는 바로 이와 같은 권력구조를 좀더 교묘하게 만들어 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가 현실화된 것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을 ‘일정한 양의 물리적 힘이라기보다 오히려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와 모든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알아서 엎드리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보가 모두 드러나 있고, 자신은 권력자를 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쥔 자에게 스스로를 순응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보화’는 권력의 입맛에 맞게 사람들을 강제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전자 판옵티콘’은 벤담의 판옵티곤과는 질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정보화’ 특성상 역(逆)판옵티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감시자만 대중들을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피감시자도 감시자를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감시자가 감시의 수단을 독점했지만, 이제는 감시자가 피감시자와 수단을 공유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를 시놉티콘(Synopticon)이라고 하는데, 권력자와 대중이 ‘동시에(syn)’ 서로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감시자의 의도와 무관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일례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들 수 있다. 영국의 ‘가디언’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두고 ‘인터넷, 대통령을 뽑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과거에는 의사소통 수단의 통제를 정치겭英맛?권력자가 독점하므로 해서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선거결과가 나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당시로서는 지배세력이 원하지 않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래서 인터넷을 이용한 권력소수자가 권력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화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이 권력자의 의도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대중이 스스로를 권력자에게 종속시키지 않고 주체적으로 정보를 다룰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개인은 단순히 정보통제의 대상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거나 가공함으로 해서 상황에 따라서는 아젠다(agenda), 즉 사회적 의제를 설정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정보의 유통도 과거에는 거대자본의 힘을 빌어야 했지만, 이제는 블로그,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 등 유통의 형태가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전달방식도 텍스트를 비롯해서 이미지, 동영상 등으로 다채로워졌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이른바 ‘개똥녀 사건’이다. 과거 같으면 묻혀버렸을 얘기를 한 개인이 인터넷을 이용해 ‘사건’의 수준에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미디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이 서로를 감시하기도 하고, 대중이 정부기관과 같은 권력기구를 감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또다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 과거 권력자에 의해 저질러졌던 프라이버시침해가 이제는 개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댓글 저널리즘’이라고 까지 얘기돼는 댓글문화는 프라이버시침해를 넘어서 대상을 ‘공격’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과거 권력자가 했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댓글문화’는 네카시즘적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네카시즘(Necarthyism)은 네티즌(netizen)과 매카시즘(McCarthyism)의 합성어로 인터넷에서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비방을 유포해 여론을 선동하는 일을 매카시즘에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이제 개인이 정보를 통제하거나 이를 이용해 누군가를 곤경에 몰아넣는 일이 더 이상 권력자만의 문제는 아닌 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보화’는 단순하지 않다. 이에 대한 입장이 백인백색이며, 문제적 현상도 정태적이지 않고 계속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대학들도 사이버세계의 유용성에 대해(2004년 이화여대) 물은 곳이 있는가 하면 데이터 스모그(2004년 연세대)현상에 대해 물은 곳도 있다.

또 총론적인 것을 묻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포탈사이트의 여론주도 현상에 대해 포탈사이트를 언론으로 봐야하느냐는 아주 상세한 것까지 묻고 있다. 그래서 수험생들은 이 문제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이에 따라 자기견해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손정규 1318논술연구소 언어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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