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공덕상사에서 고형우 장인이 특수 접착제를 이용해 해녀 잠수복을 만들고 있다.
“몸을 달달 떨면서도 바다에 들어간다고 수선을 부탁하니 일을 그만 두질 못하겠어. 저세상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하는데 해녀들과의 약속은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

고형우 장인(71)은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허름한 슬레이트집에서 40년 동안 해녀 잠수복을 만들어왔다. 서른한 살에 배운 기술로 1982년 ‘공덕상사’를 차린 후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처음엔 일본에 머물던 부친을 통해 높은 관세를 물고 잠수복을 수입했다. 용돈벌이로 팔던 잠수복을 직접 만들게 된 것은 연좌제 때문.

가까운 친척들이 조총련에 있다는 이유로 입사 지원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걸렸다. 산불을 감시하는 일마저 주어지질 않았다.

숱은 좌절을 딛고 고무 잠수복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사업 초반에는 욕을 많이 먹었다.

무명천으로 만든 ‘물적삼’(상의)’과 ‘소중이’(하의)는 수 백 년을 이어온 전통 해녀복. 1970년대 초 갑자기 등장한 검은색 잠수복을 놓고 “저걸 입으면 검은 얼굴을 가진 애기를 낳는다”며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스스로 만들어왔던 해녀복을 돈을 주면서 사야했고, 몸을 꽉 죄는 ‘이상한 복장’에 대해 보급 초기에는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안 입겠다’고 할 때, 남들을 설득하고 잠수복의 장점을 대변해 준 하모리 해녀들은 어느덧 평생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료가 됐다.

그는 “겨울에 30분을 버터지 못해 덜덜 떨며 나오던 하모리 해녀들이 잠수복을 입은 후로는 3시간 동안 물질을 했다. 어획량과 소득이 늘면서 잠수복에 대한 불신은 수그러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잠수복 만드는 일이 재단이 아닌 ‘생명을 깁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우선 치수를 재는 것부터 꼼꼼해야 한다. 측정과 재단에 오차가 있으면 물속에서 활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칫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어서다.

머리와 목, 가슴, 허리는 기본이고 팔뚝과 허벅지 등 모두 19곳의 신체를 측정해야 한다. 나이와 성격도 감안해야 하다.

40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을, 나이든 해녀들은 약간 헐렁한 것을 좋아하다. 잠수복 제작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이유다.

그의 단골은 도내뿐만 아니라 강원도과 백령도, 여수, 대천 등 전국에 있다. 한창 때는 백령도까지 가서 치수를 직접 재고 왔는데 그곳에는 특이하게 20여 명의 해남(海男)이 있었다.

해마다 300벌, 지난 40년 동안 모두 1만 벌이 넘는 잠수복을 만들어 온 장인도 세월 앞에서 점점 힘이 부쳐가고 있다.

장인들은 해녀와 함께 고령화에 접어들었고, 잠수복 제작도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1만5000명이 넘던 제주 해녀는 지난해 말 기준 4574명으로, 이중 70세 이상이 47%를 차지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원단은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최근 엔화 약세로 일본 수출상들이 원단 가격을 올리겠다고 통보를 해왔다.

환율 영향으로 소라 수출마저 감소하면서 해녀들은 새 잠수복을 구입을 꺼려해 고형우 장인을 포함 도내 6개 잠수복 제작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업체마다 수선은 무료로 해주면서 더 나은 수익은 기대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늙어가는 나를 대신해 서울에서 살던 딸이 내려와 기술을 배우며 가업을 잇고 있다”며 “지금껏 해녀들 덕분에 먹고 살아온 만큼 몸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 하겠다”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