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왜구 격퇴 위해 구축된 '수군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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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명월성지] 군사 요충지...한림항 축조 때 허물어졌다 일부 복원

조선시대 제주에는 섬을 빙 둘러 군사들이 주둔하던 진성 9개가 존재했다. 그 중 제주 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진성이 바로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명월진성이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구축된 이 성은 1976년 9월 명월성지(明月城址)란 이름으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원래 명월진성은 조선 중종 5년(1510)에 제주목사 장림이 목책성(木柵城)으로 설치했다. 당시 규모는 둘레 3020척(915m)에 높이 8척(2.4m)으로 남쪽에 문을 두고 문 위에는 루(樓)가 설치됐으며 전체적으로는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명월진성은 왜구들이 명월포 앞 비양도를 근거지로 삼아 제주를 침략할 경우 격퇴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오늘날 해군기지의 기능과 유사하다.

 

실제로 명월포는 고려시대 여·몽 연합군에게 쫓겨 진도를 탈출했던 삼별초의 별장(別將) 이문경이 선봉대를 이끌고 제주에 상륙해 고려군을 제압했던 곳이다. 고려 말에는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의 군대가 제주로 들어와 교전했던 장소다.

 

선조 25년(1592) 목사 이경록이 목성(木城)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이 지금의 명월진성으로 둘레는 1360m, 높이는 4.2m 규모다.

 

명월진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과 객사 3칸, 사령방 2칸, 공소 2칸, 무기고 4칸, 도청 4칸, 진고 4칸, 창대청 3칸, 중화청 2칸, 진졸청 3칸, 창고 4동 등이 지어졌다.

 

병력은 만호 1명과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사 22명, 서기 30명이 배치됐고, 소관 봉수대 2곳과 연대 7곳에는 별장 54명과 봉군 132명 등이 배속됐다. 해안에는 판옥선을 보유한 수전소가 있어 노 젓는 군사 103명 등이 근무했다.

 

명월진성은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데 ‘명월조점’과 ‘명월시사’다.

 

숙종 28년(1702) 11월 13일 제주목사 이형상이 명월진성에서 성정군(城丁軍)의 훈련과 말 1064필에 대한 점검 장면을 담은 것이 명월조점이고, 명월시사는 이튿날 시험을 통해 활을 쏘는 군사를 뽑는 모습을 묘사했다.

 

탐라순력도 제작 당시 명월진성 내 성정군은 412명이고 말을 기르는 목자와 보인은 185명, 마필은 1064필, 창고에 저장된 곡식은 3300여 섬이란 내용이 명월조점 부기에 나온다.

 

도내 다른 진성의 사령관으로 조방장(助防將)이 배치됐는데 명월성은 영조 40년(1764)부터 기존 조방장에서 만호로 승격됐고 제주 출신 무과 급제자들이 우선 충원됐다.

 

그 만큼 당시 명월진 일대가 군사적인 요충지였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명월진성은 한림항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성의 돌이 활용되면서 허물어졌다. 그동안 명월진성에 대한 수차례 복원과 정비가 진행된 결과 남문을 중심으로 성곽 일부가 복원된 모습을 띠고 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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