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방이던 이웃 마을과는 서로 좋던 나쁘던 경쟁이 있게 마련인데 이를 상호 바람직한 방향으로 경쟁하면서 발전을 도모한다면 이는 선의적인 일이나 이와 달리 배타적인 대립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 서로 늘 다투게 되고 서로 사돈(査頓)도 맺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실례(實例)가 잘 나타난 곳을 제주섬 안에서 찾는다면 한경면의 고산리 ‘차귀’와 신창리‘새-두미’에서 잘 나타난다.

 

본시 고산리는 대정현의 속현(屬縣)인 차귀현(遮歸縣)에 속하고 신창(속칭 ‘새-두미’)은 제주목 두모(頭毛; 속칭 ‘두미’)리에서 분향(分鄕)한 마을이었다. 두 마을 사이에 존재하는 한 마을의 있으니 이를 용수리라 한다. 용수리도 서쪽 ‘지삿-개’ 포구가 있는 용수(일명 우포(友浦)) 마을은 고산리에 가까워 차귀의 정서에 일치한다. 그러나 동쪽 용수리는 일주도로 길가에 ‘용-못’이라 마을이라서 용수(龍水)리인데도 신창리(새-두미)의 정서와 일치한다. 그래서 김두진(金斗珍) 국회의원은 당시 한림면에서 분면(分面)하여 한경면으로 분리할 때에 마을 이름마저 독립시켜 아예 용당(龍塘, 용-못)리라 작명했다. 

 

나는 1996년 용수국민학교가 폐교할 때 당시 북제주교육장으로 참석하여 마을 별로 각각 다른 정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에 나는 고산 마을과 신창 마을, 그 두 마을 사이에 설촌(設村)한 용수리 마을 등 3개리의 역사성과 문화성에 관해 이런 차등성의 이유를 찾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던 중 조선시대 초기부터 고산 사람들은 대정현의 대정향교에 다니고 신창 사람들은 제주목(濟州牧)의 제주향교로 출입을 했을 때부터 문화의 다름이 잉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로의 갈등과 경쟁은 향교교육에서 비롯되었다. 600여 년 동안 식자층이 집결체인 제주유림과 대정유림의 정서에서 발원된 것이다.  

 

이는 당시 두 향교의 학구가 이와 같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600년 동안에 걸쳐 제주유림과 대정유림은 늘 대립하는 양상으로 이어져 왔다. 신창유림은 대정사람을 왜소하다고 해서 ‘대정-몽생이’이라고 폄하(貶下)하기가 일쑤고, 고산유림들은 늘 말하기를 ‘제주목-안’ 사람들은 너무 독하다고 비난하여 그러니 “‘목(牧)-안’ 사람들 앉아난 자리에는 (독하여) 풀도 안 돋는다.”라고 우르렁거린다. 이런 마을의 관계는 이웃이면서도 서로 사돈을 맺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제주 섬에서 이웃과 가장 상극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초기 토지조사와 면리(面里)의 명칭과 구획을 설정을 할 때 고산과 신창은 제주도(濟州島) 구우(舊右)면(현재 한림읍) 관내로 통합되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마을 유림들은 반기를 들었으나 일본의 강권에 묻혀버렸다. 1945년 해방되기까지 유림이 지배하던 사회여서 두 마을의 식자층은 고정된 의식구조를 바꿀 수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고산 주민들은 반골기상을 이어받아 일제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일제 관리는 별로 없고 대표적인 항일 인권변호사 이창휘(李昌輝)란 사람의 배출되고 일제의 관리들이 많이 배출, 신창 주민들은 새 시대에 협조하더니 순종의 미덕을 발휘, 그러나 도를 넘어 고등계 형사 김문용(金文用) 같은 분도 나왔다.

 

일제 중기에 1면 2교제를 실시하게 되어 우선 고산사립국민학교를, 이어 한림교 부속 신창분교장(후일 신창교로 승격)을, 1면 3교제에 따라 일제 말기에는 귀덕사립국민학교를, 각각 개설하여 서로 애향심을 발휘했으니 한림면에는 3개의 초등학교에 1개의 2년제 금악간이학교를 두게 되었다. 1945년 8·15의 기쁨은 마을마다 뿜으며 각기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생도들이 졸업하게 되니 교육열은 애향심이 지나쳐 신창중·고산중·저청중을 각기 개설했다. 이들 중학교의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타 읍면에 뒤질세라 1953년에 신창농업고등학교를 개설했으나 재정문제와 학생자원의 감소로 1957년 제1회 졸업을 하고 폐교되었다.

 

그러나 관에 의뢰하지 않은 고집스러운 고산리 주민들은 뒤늦게나마 주민들이 자금을 모아 민립(民立)성격의 학교인 사립 고산상업고등학교(현재 한국뷰티고등학교)를 개설하여 최근 교육청에 기부, 오늘은 공립학교로 유지되고 있다. 전자는 신창농고를 설립에 앞장선 중등교장 좌유일(左有日, 신창)에서, 후자는 고산상고를 설립하는데 헌신한 교포 재벌가 고원일(高元一, 고산)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성향이 하나는 공립학교요, 하나는 사립학교였다. 고산상고도 고원일이 일본에서 타계, 학교 존립에 한계를 느껴 주민들은 옹고집(壅固執)을 꺾고 공립화의 길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