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항로시대 일본∼탐라국 항해는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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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랑국, 그 뱃길을 찾아서<2>장보고도 험난한 뱃길
일본이라는 위치는 지리적으로 망망한 바다를 건너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대로 뱃길을 오고 갈수 없는 곳이다.이 당시 항해라면 연안 항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연안 항해란 섬이 나타나고 육지가 보일 때 가능하다. 일본과 탐라국 사이에는 섬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부산지경을 향한 뱃길이라면 일본 규슈(九州)지방에서 부터 이끼섬·대마도 등지로 거쳐야 한반도의 남동해안으로 올수 있지만 탐라로 바로 뱃길을 잡는 것은 그 당시 상상 할수 없는 노릇이다.

항해자들은 시인거리에 있는 섬이나 육지를 확인 할수 있어야 뱃 머리를 잡는다.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 항해는 떠날 염두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규슈에서 탐라까지 항해를 한다고 하면 300 여㎞의 거리이다. 이 가운데 오도 열도가 있지만 수천년 전만 해도 이런 항해는 불가능 하다. 배도 발달하지 못한 시대일 뿐더러 한반도와는 달리 일본은 씨족,부족국가 같은 집단 형태가 형성되지 못한 시대였다. 서기835년 일본의 유명한 고승 엔닌도 견당선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다가 두 번이나 실패를 한 끝에 838년 6월에야 중국 땅을 밟을수 있었다. 그가 구법활동을 벌이고 일본으로 돌아올 때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 선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귀국길에 오를수 없었다. 그가 중국을 와서 다녀와서 쓴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있다. 이 일기속에 그 당시 뱃길에서 겪은 이야기가 많이 있다. 높은 파도와 바람에 돛이 망가지고 새들도 날다 지쳐 뱃전에 앉은 채 날 생각도 않은 모습들을 적고 있다. 항해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생생하게 남긴 소중한 고전이다. 이것은 얼마나 바닷길이 험한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50∼60년 전 돛배를 타고 수십년 동안 강진 칠량옹기를 싣고 제주바다를 드나들었던 20여 명이 넘는 사공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신일봉(84세)씨와 김우식(83세)씨를 만나 이 두 노인이 겪었던 뱃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두 노인은 제주를 오고간 마지막 사공의 산 증인이다. 반세기가 넘는 옛 항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백 수천년전 항해 모습을 그대로 듣는 것 같았다. 두 노인의 이야기도 제주와 강진 사이에 수 많은 섬들이 징검다리가 돼주어 건널수 있었다고 한다. 예상치 않은 큰 바람을 만나면 가까운 대모도 청산도·소안도·추자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피난처로 삼을수 있어 그나마 마음놓고 항해할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 섬들은 바람 방향이 바뀌면 며칠씩 신풍을 만나기 위한 후풍처로 쉬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터 한라산이 선명하게 나타나서야 한숨을 돌린다고 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도 뱃길은 이러할진데 고대 항해에서는 섬들은 항해자들에게는 뱃길을 안내하는 등대와도 같은 목표물였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강진현 편에 탐라의 사자(使者)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로 이어지면서 어마(御馬),병마(兵馬)을 비롯한 많은 물산들이 오갔던 뱃길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우암 송시열에서 추사 김정희에 이르기 까지 그 시대의 굴곡진 역사를 뒤 돌아 볼수 있는 뱃길이기도 하다. 이 뿐 만 아니다. 네델란드 출신 하멜 일행이 1653년 8월에 제주에 표착해 다음해 5월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갔던 뱃길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뱃길은 나라가 바뀔 때 마다 나라의 운명과 함께 갖은 애환의 담겨있는 뱃길임에는 틀림 없다. 이처럼 고대부터 끊임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사람과 물산들이 오고 간 오랜 뱃길인 것이다.

필자가 지난달 벽랑국 실체를 찾기이한 뱃길답사에서 이 뱃길을 ‘신화의 뱃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배경에 있다. 이것은 탐라국 탄생역사의 동반자인 세 공주가 건너온 뱃길 일뿐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이 뱃길 주변 도서에서 나타나는 유물유적들에서도 살펴 볼수 있는 것이다.한 예로 마한 세력을 중심으로 영산강 유역 선사문화와 가락국을 위시한 남동해안의 선사문화가 교차하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써 제주로 이어졌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뱃길은 한반도와 탐라국으로 이어지는 가장 빈번하게 이뤄진 대표적인 해상 뱃길이며 문화 이동로의 중심에 있는 곳인 것이다. 또한 남동·남서해안의 다도해상에서 발굴 되는 유물들이 이러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도해에서 이들 섬들이 고대 역사의 보물 창고로 지목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필자는 몇해전 흥행했던 미국영화 ‘타이타닉’이 70여 년전 한 할머니의 기억속에서 되살아난 두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떠 올려 보면서 천여 년 넘게 감추어 있던 벽랑국의 실체와 비교하면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위안을 가져 보았다. ````<채바다 고대 항해탐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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