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년 겨울 그 광풍 견딘 ‘4·3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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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보호수를 찾아서 <8>안덕면 동광리 팽나무
나무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먼저 간 친구들을 그리며 나무는 얼마나 더 많은 아픔의 시간을 보내야 할까.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마을은 흔적도없이 사라졌지만 나무는 들판 한가운데 홀로 서서 옛 추억에 잠겨있다.

지난달 27일 동광리 속칭 ‘마전동(麻田洞)’에서 만난 팽나무는 마을을 잃어버린 아픔이 배어있는 나무다.

수령이 약 450살 가량인 이 나무는 키가 약 4.5∼5m, 가슴높이 둘레 2m쯤 되는 데, 처음 본 순간 서쪽 밑동에서 2m 높이까지 대형 수술을 받은 흔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동서로 줄기와 가지들이 고루 펴져 수형이 볼만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이날 본 팽나무는 본 줄기는 사라진 채 동북으로 뻗은 곁줄기가 철제 기둥에 의지해 힘겨운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쪽의 본 줄기는 1990년대 초반 벼락을 맞고 부러진 후 1993년, 1998년 두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는데 벼락 피해로 9m에 이르던 키가 절반으로 줄었다.

2002년 8월에는 태풍으로 친한 ‘친구’를 잃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가지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한 채 마을이 사라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친구 팽나무(당시 나이 약 400년, 키 13m, 가슴높이둘레 2.8m)가 밑동이 부러지면서 먼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나무가 서 있는 일대는 제주4·3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삼을 재배했던 마을이라 해 ‘마전동’ 또는 ‘삼밭구석’이라 불렸던 조그만 마을이었다.

50여 가구가 목축과 농사로 생활해 왔는데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방화되면서 주민들은 마을 인근 속칭 ‘큰넓궤’라는 동굴에 숨었다 다시 영실 부근 볼레오름까지 피신했는데 이 와중에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등지고 ‘간장리’(동광리)에 성을 쌓아 정착하면서부터 마전동은 현재까지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나무 앞에 세워진 ‘4·3사건 위령비’ 문구만이 유일하게 이곳이 과거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음을 알려준다.

희생자 유족들은 1999년 4월 옛 마을 중심지였던 팽나무 앞에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4월 3일이 지난 첫 일요일 이곳에 모여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고향을 잃어버린 김여수씨(75·안덕면 동광리)는 “팽나무 주변으로 연못이 있었는데 물이 귀했던 옛날에는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며 하루종일 놀았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은 팽나무 그늘에서 마을 대소사를 논의하기도 했다”며 옛 일을 회상했다.

아픔을 간직한 나무에게도 봄은 오는가 보다.

생장을 멈춘 고목에서나 볼 만한 백태가 곳곳에 드러난 가운데 쌀알만한 새싹들이 줄기 곳곳에서 촘촘히 맺혀있다.

마치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 본연의 의무 만큼은 죽을때까지 다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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