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부터 1980년까지 교육의 현장에 근무하였던 교육자들은 국민교육헌장의 이념구현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체험했다. 그러나 얼마 없어 차츰 열기가 식어가더니 위정자의 잘못으로 언제인가 헌장 자체가 없어져 이미 우리 앞에 살아졌다. 얼마나 서글픈 일이 아닌가. 오늘의 젊은이의 세태를 보면서 더욱 그렇다. 오늘의 청소년 탈선과 비위를 바로잡기 위하여 ‘국민교육헌장 구현’을 출마한 대통령 입후보자의 선거공약으로 발표하면 어떠할까?

 

1968년 12월 5일에 반포된 교육헌장. 우리나라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근본목표를 세우고 민족 증흥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밝힌 교육지표이다. 1968년 6월에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당시 문교부장관 권오병(權五柄)에게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망라하여 교육장전을 제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주재로 제1차 심의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박종홍(朴鍾鴻)·이인기(李寅基)·유형진(柳炯鎭) 등이 헌장 초안을 다듬었다.

 

같은 해 11월에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12월 5일에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이 헌장의 제정 소식을 들은 자유중국의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기선을 빼앗겼다”고 부러워하면서 자유중국 주재 한국대사 김신(金信, 김구선생의 아들)에게 자료 수집을 당부하였으며 서독의 볼노브(Bollnow)도 독일청년회의 정신적인 교량 역할을 하여줄 수 있는 헌장 제정에 고심하고 있던 차라고 하면서 찬사를 보내왔다.

 

그런데 웬걸 어느 대통령 때에 일부 현학적(衒學的)인 논객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일본천황의 칙어를 모방했다든가 ‘반공을 국시로 삼아’라는 말은 시대성에 맞지 않다더니 ‘박통(朴統)의 국수주의적 발상’이라든지, 아니다! 우리 고종황제도 국민에게 칙어(勅語)나 조서(詔書)를 내린 적이 있다. 비록 문맥에 잘못이 있다면 헌장을 구현하면서 가르치면 풀리는 문제이다. 초안 작성자 박·이·유 등은 우리나라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를 폄훼할 수 있는가.

 

내용은 민족중흥을 역사적 사명으로 내걸고 초장은 우리 국민이 한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높은 긍지와 그에 따른 투철한 사명의식을 밝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성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서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중장은 국민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인윤리·사회윤리·국민윤리의 순으로 실천해야 할 규범과 덕목을 명시해 놓았다.

 

특히 종장에서는 반공 민주주의정신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고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산주의의 도전을 이기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며 국민각자가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굳게 매진해 나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민족의 주체성 확립,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 창조, 개인과 국가의 일체감을 통한 민주복지국가의 개화를 중심으로 한 이 헌장은 모든 국민이 알아야할 기본정신과 실천목표가 되어 보급되었다. 선포일인 12월 5일은 1973년 3월 30일에 대통령으로 정부 주관인 기념일이 되었으며 매년 문교부에서 주관해 헌장 이념의 구현을 다짐하는 기념식전(式典)을 베풀고 스승에 대한 공경을 표시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하여 왔다.

 

지금도 몇몇 학교의 모퉁이에는 헌장탑이 남았으나 이런 교육이 없으니 헌장탑 글은 허상이다. 그러니 이를 통탄한다. 당시 모든 서적의 머리 한 장에는 헌장 전문을 게재하여 책읽기 전에 먼저 헌장덕목을 읽고 다음 본문을 읽도록 하였다. 대통령의 치적은 공과가 반듯이 있는 법인데 이 헌장을 패기한 일은 커다란 잘못이다. 오늘날 낳아준 어버이를 죽이고 가르쳐준 스승을 때리는 일이 비일비재라 하니 늙은이의 하는 소리에도 젊은이여 귀를 기울여 다오!